Home l ATA소개 l 새소식 l 추천 l E-mail l 후원광고 l 찾기 l English 

 ATA > 지구촌 > 디자인의 현재와 미래


 

 

 2004년의 현주소: 디자인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질문

 

 

으로  십년간

건축, 조경, 도시설계에서 유망한 역할, 활동, 분야는 무엇인가? 

 

 

응답자 :


스탠 앨런(Stan Allen; 프린스턴대학 건축대학장)

피터 데이비(Peter Davey; 영국 Architectural Review지 편집인)

앙드레 뒤아니(Andrés Duany; 건축가 겸 도시계획가)

할 포스터(Hal Foster; 프리스턴대학 현대미술 교수)

자하 하디드 & 패트릭 슈마허(Zaha Hadid & Patrick Schumacher; 건축가 / 자하 하디드 건축사무소 파트너)

폴 쉐퍼드(Paul Shepheard; 영국 건축가)

마이클 소르킨(Michael Sorkin; 건축가)


 

 

 Harvard Design Magazine (Spring / Summer 2004)

 

 

앨런 :
  건축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도시 문화와의 연계는 변화를 겪고 있다. 마치 20세기 전반, 엘리베이터, 방화구조, 그리고 도시 대중교통이 도시를 변형시켰듯이, 20세기 후반에는 주간(州間) 고속도로 시스템, 연방 대출 제도, 그리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도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결과로, 무엇이 도시를 구성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전체적으로 수정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에서 모두 방대한 국제도시가 나타났다. 반면, 서구의 선진국에서는 경계 도시(edge city)와 교외 주거지의 분산적인 네트워크가 일반화되었다. 거대도시와 교외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 둘은 비계획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짝꿍으로서, 정치적 합리화를 통해 확장하고 이동성 및 네트워크 경제를 바탕으로 번성한다. 건축가들은 최근 일종의 이국풍을 느끼게 하는 거대도시, 그리고 어려운 상황 아래서도 지속적으로 교외로 이동한 사람들이 유발하는 한없는 독창성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경제사가, 도시지리학자, 사회과학자들이 교외 생활에 대해 그 근거를 잘 마련하고 연구한 반면, 건축가들은 이제까지 교외의 진부한 일상성을 회피하여왔다.

  건축가들이 이런 분산된 새로운 도시 형태를 전적으로 무시하였던 것은 아니다. 모호한 지역(terrain vague)에 대한 유럽의 담론에서는, 이민자와 다른 소외계층이 모여있는, 전통적인 서유럽 도시의 주변부가 논의되었다. 한편, 신 도시주의자(New Urbanist)들은 미국의 교외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건축, 조경, 그리고 도시설계에서 가장 시급한 새 역할은 이런 새로운 교외영역을 다루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세 분야의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교외에 대한 우리의 소중한 선입견을 일부 포기하여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교외를 주로 주거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상황은 바뀌고 있다. 1979년, 미국에서 사무소 공간의 85%가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와 교외는 그 시장을 반반씩 차지한다. 한때 교외는 밀집한 도시 중심부에 덧붙여진 전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둘의 차이를 말하기 어렵다. 피닉스 광역시(Greater Phoenix)에는 ‘시내’가 거의 없지만 2004년까지는 거주자가 천만이 될 것이다. 하나의 너른 지역으로 생각될 정도인 로스앤젤레스 광역시(Metropolitan Los Angeles)는 뉴욕 광역시(greater New York City)보다 실제 평균밀도가 높다. 이런 ‘스프링클러 도시(sprinkler city; 자연 속에 산재하고(sprinkled) 잔디 살수기(sprinkler)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는 대체로 자연발생적이기보다는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 기존 중심에 관계없이 등장한다. 게다가 교외 경관의 사회적 성격은 변화하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대다수가 교외에 산다; 스페인계의 50%, 흑인의 40%가 이 새로운 교외에 산다. 이 모든 것들에서 건축, 조경, 도시설계의 중요한 도전은 물론 재미있는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도전은 엄청난 독창성을 요구하며 도시에서 건축의 전통적 역할에 대해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교외가 급격히 확산함으로써 파생된 가장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되돌릴 수 없는 환경 손상이다. 뉴저지 주에서만 매일 50에이커(6만 천여 평)의 땅이 개발로 사라진다. 나는 환경친화 건축(green architecture)의 가능성에 대해서 다소 비관적이지만(환경친화건축은 건물 단위로 제한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그것은 반생태적인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적으로 민감하다는 이미지를 팔려는 기관이나 회사에 의해 너무 쉽게 사용된다.),  건축과 도시가 계속되는 개발의 영향을 조정할 수 있는 개발방식을 생각해내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스마트 성장(Smart Growth)’ 운동의 출현으로 일부 환경주의자들은 성장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불가피한 성장에 대해서는 좀더 분별력 있게 물꼬를 트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운동은 ‘스프롤(sprawl)’에 대한 대안으로서, 밀집한 “도시” 중심을 지지하는 신 도시주의자의 암묵적인 의제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힘을 얻었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도시 형태와 연결됨으로써 장기적인 효과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0년 동안 교외 경관에 일어난 변형들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19세기의 디자인 기술로는 효과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현대 생활과 현대 기술의 복합성, 곧 지금 교외에서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진정한 요구와 바람을 고려하는 혁신적인 새로운 제안이다. 그리고, 개발이 삽입되어야 하는 복잡한 생태학적 그물, 곧 교외의 사회적, 자연적 생태학 사이를 연결하는 피드백의 고리가 필요하다.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은 교외의 개발에 대한 실제적인 새로운 모델을 상상할 수 있는 특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모델이란, 발전된 생태학적 원리들을 통합하는 것인데, 그 생태학적 원리들은 다시 건축적 고안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중공업을 해외로 이전함에 따라서 생겨난 유휴지(brownfield; 산업 재구조화 과정에서 도시 지역에 남겨진 토지)를 창의적인 해법으로 다룸으로써, 남은 미개발 녹지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고 기존의 도심 부근에 버려진 지역에서 개발이 일어나도록 할 수 있다. 

  건축가들이 계속 교외 경관을 무시한다면, 분명 우리는 이런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교외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사회적·공간적 양상들의 결합이 환경적 문제의 급박성과 연결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건축가, 조경가, 그리고 도시설계가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생태학자, 교통계획가와 엔지니어, 사회과학자, 소매업 컨설턴트, 마케팅·커뮤니케이션·브랜드 전문가와 협동작업을 하여 그런 문제에 활발히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러한 교외를 대상으로 하는 다학제적 활동이 다음 십년간 설계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새 영역이 될 것이라고 본다.


데이비 :
  새로운 아방가르드가 요구된다. 그것은 언론을 통해 크게 알려진, 저속하고 충격적인 것이 아닌, 진정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적 가치의 중요성과 지구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지식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향을 말한다. 그것은 엄청나게 독창적이고 다양하며, (내가 앞에서 언급한) 매우 넓은 범주의 분야들에 관련될 것이다.

  그것에는 널리 확산될 수 있는 사례들이 요구될 것이며, 따라서 야후가 하는 것처럼, 매체를 활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매스컴과 전국 TV방송에서 건축을 토론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방송내용의 대부분은 쇼 산업다운 저속한 것이거나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의 훌륭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을 포함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를 매체가 강조하도록 하는 데에 많은 것이 요구되지는 않을 것이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전문 조직들은 모든 언론이 인공 환경과 그것의 잠재력을 좀더 성숙하게 분석하도록 홍보하여야 한다.


뒤아니 :
  가장 유망한 역할은, 기디온(Gideon)이 근대성을 정의하는 데 사용한 구절인, “다수의 도전”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한 가지 역할은, 대도시 지역 또는 광역적인 지역을 포함하는 30년 계획을 준비하는 것이다. 현재 그런 계획은 디자이너들의 참여 없이 만들어진다. 또 하나의 역할은, 매년 100만호의 주택을 집단적으로 건설하면서도 거의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설계를 담당하는 그런 건설회사 중 한 곳에 침투하는 것이다. 또는, 예를 들어 디자인을 다루는 TV 쇼를 제작하면 어마어마하게 효과가 클 것이다. 소위 “디자인 채널”은, 너무 저속하지만 않다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대량 주문의 결과로 최고의 생산품을 만듦으로써, 권력의 통제력을 취하고 월마트의 구매자(buyer)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역할에는 진정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마이클 그레입스(Michael Graves)는 이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알도 로시(Aldo Rossi)는 “미국에서 양은 질이다.”라고 말하였다.

  재능을 가장 크게 낭비하는 사람들에는, 오래 가지 못하는 상업 인테리어 또는 매우 소수한테만 영향을 미치는 부유층 주택에 자신의 디자인을 제한하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아름답게 디자인된 레스토랑은 아마 교외의 넓은 지역보다 디자인에 있어서 더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때 그러한 프로젝트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 세계가 요구하는 것이 컴퓨터의 Model Ts일 때, 건축가들은 다음 세대의 부가티(Bugatti; 고급 스포츠카)의 디자인에 몰두한다.


포스터 :
  현재의 건축이 가진 특성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발달된 소비 자본주의 전체에서, 디자인 그리고 미술·의상·비즈니스의 디스플레이가 팽창(inflation)되었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뭐든지 할 수 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디자이너로 재규정된다. 건축이 토탈 디자인으로 확장하면서, 그것은 또한 해체의 위험을 안고 있다. “건축가들이 모든 분야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곧 필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과정의 모든 측면들을 한결같이 통합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해질 것이다.”라고 하니 라시드(Hani Rashid)는 썼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디자인 컨설팅 분야의 간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OMA를 보완하는 AMO 같은 것), 당신은 더 이상 메이저 건축가로 간주되지 않는다. 

  일부 건축가는 이런 토탈 디자인의 조건을 반긴다. “건축가는 미래의 패션 디자이너가 될 것이다. 새로운 건축 네트워크 스튜디오는 클럽, 아뜰리에, 연구실, 그리고 자동차 공장의 혼합체로서, 플러그를 끼우듯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개입하는 것을 장려한다.”라고 벤 반 버클(Ben Van Berkel)과 캐롤라인 보스(Caroline Bos)는 말한다.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건축가가 스스로 창조자에서 코디네이터와 메니저로 변신하였다. 건축가는 여러 분야의 컨설턴트와 전문가에 의해 속박된 엉터리 관리자가 되었다. 건축가의 의무는 다양한 기술적, 경제적, 법률적, 기능적 요건들을 조정하는 것으로 한정되게 되었다.”고 마리오 보타(Mario Botta)는 언급한다. 여기서 변증법적 관점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토탈 디자인을 향한 경향의 진보적 측면들(예를 들면, 건축, 조경 설계, 그리고 도시 계획이 실무나 교육에서 더 이상 그렇게 나누어 지지 않는 방식.)과 그것의 의문스러운 측면들(이에 대해서는 카스 우세루이스(Kas Ooserhuis)의 다음 코멘트가 하나의 예시가 될 것이다. “우리 건축가들은 이제 감성적인 양식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데이터의 흐름에 형상을 부여하고, 정보를 조각하여야 한다.)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다.  


하디드와 슈마허 :
  아방가르드적인 건축 작업에서 가장 흥미롭고 보람있는 영역을 찾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문제를 조사하는 것, 그리고 점재적인 해법(그리고 해법을 구체화하는 기법들) 을 확대하는 것이다. 여전히 디지털 기반 설계와 대량생산 도구에 관하여 실험적 작업을 할 필요성이 크다. 건축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영역 중 하나는, 새로운 복합적이고 동적인 협력 패턴이 공간 체계로 적절한 번역될 것을 요하는, 법인 재구성일 것이다.

  불안한 사회가 새로운 특징을 가진 문제들을 부과함으로써 건축을 내모는 한편, 새로운 디지털 디자인 매체와 극소전자 혁명은 건축을 미지의 기회로 이끈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새로운 창조적 기회를 탐구하는 것이 오늘의 건축가들이 주어진 문제들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건축 자원을 제공하는 쪽으로 추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건축분야 안에서, 조사와 문제해결 사이의 혁신이 극단적으로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프로그램의 요구 분석과 새로운 공간적인 레퍼토리의 증식이라는 두 측면에 노동을 생산적으로 분배하는 계기가 제공되곤 하였다. 네덜란드 아방가르드와 미국 아방가르드에 의해 각각 구체화된 두 측면은 반 독립적으로, 상당히 성공적으로, 추구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두 반대되는 이데올로기를 낳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둘 다 똑같이 일방적이다. 그래서 창조적인 종합, 곧 넓은 마음과 가벼운 발로 두 영역 사이를 진동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와 ‘해결’ 사이에 1:1의 대응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해법의 탐색에 동원될 수 있는 것처럼 해법이 문제의 탐색에도 동원될 수 있다. 우리가 ‘디자인 연구’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와 해법 모두에 초점을 맞춘 잘 규정된 틀 안에서 이러한 진동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종합에 대한 이 요구를, 연구 의제를 초기에 분석하지 말자는 것으로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조사와 문제 해결이 모두 요구되는 것이다. 


쉐퍼드 :
  나는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 주택사업 시절의 세련된 철골주택 디자이너인 피에르 쾨니히(Pierre Koenig)가 일군의 22살짜리들에게 조립식 철골 주택으로 주택문제를 풀도록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만약 자네들이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보잉사가 할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보잉사가 그것을 잘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말에 동의한다.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차와 같은 가격의 집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을 마비시킬 것이다. 이제 그 프로젝트는 백 년 동안이나 존재하여 왔지만 아무도 그것을 하지는 못하였다. 왜 그럴까?

  나는 널리 보급된 전쟁 기계의 기술이 모든 행동의 성향을 결정했다고 생각할 만큼 20세기적이다. 독일을 청소해버릴 거대한 공군처럼 주거를 건설하는 것은, 그 틀 안에서는 올바르다. 21세기 인간인 나의 젊은 사진가 친구 댄(Dan)은 이전 사진가 세대가 보도를 위해 가졌던 ‘겨냥해서 찍는’ 태도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사진가들이 보도를 위해 세계의 전쟁지역에 뛰어들었음을 기술한다. 니콘은, 20세기의 물건으로서, 기관총처럼 번쩍였다. 그것은 마치, ‘승리를 위해 건축하는’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제작되는 그 철골 주택들과 같았다. 그의 사진은 세심하게 연출된, 풍경․이야기․인물의 혼성물이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20세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래, 이제 우리는 테러리즘과 테러 봉쇄정책에 얽혀있어.” 양쪽 진영에서의 전투행위는 비밀스럽고, 깊이 연구되었고, 단지 지역적으로만 유효하다. 그것이 확산되는 것은 소문과 귀속말로 전해지는 평판에 의지할 뿐이다. 영국에는 수퍼텍스트(Supertext)라 불리는 일군의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우물과 학교를 건설하는 사회 프로젝트에 관계한다. 그들은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술기금 조직은 세계은행의 감독을 받는 개발 단체보다 다양하고 추방되지 않으며, 그렇게 해야 이례적인 접근방식을 위한 자금이 좀더 쉽게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것’은 예술과 관련된다. ‘그것’은 모두 지역적이다. 큰 그림은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것’을 인공의 황야라 부르자. 그러나 건물, 조경, 도시생활의 디자이너들이 그들 스스로를 작은 것, 지역적인 것에 한정할 수 있을까? 그들이 모두 다루고 싶어 하는 것은 큰 영역과 커뮤니티 공간이 아닌가? 기계들로부터, 큰 투자를 하고 몇 배의 보상이 되는 지역 건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큰 그림은 정체(停滯)와 문제성 결과들로 골칫거리가 된다. 우리는 꿰매는 만큼 푸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나는 이것이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푸는 것은 적어도 의젓한 생활이다. 사회의 민주적 큰 그림은, 그것이 대체한 이전의 것이 그렇듯, 비슷하게 골칫거리이다. 해법이 없으며 융통성있는 건축도 없다. 진화는 개개의 단위들이 변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당하지 않은 조직들이 분리됨으로써 일어난다. 그러면, 위에는? 삶 자체이다. 단기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조직도 다른 것들과 같이 풍부하고 충만한 생명을 갖는다.

  우리가 빠져나오고 있는 20세기 황무지는 지구의 표면을 고치려는 꼼짝달싹 못하는 시도로 가득 찬 이상한 공백의 장소이다. 파시즘, 공산주의, 뉴딜, 연방, 남자의 가족, 국제 양식 등의 전체적의 해법, 그리고 세계대전, 대량 살상무기, 그리고 인종말살. 나는 이 명제들을, 빗발치는 포 공격의 여파로 생긴 분화구와 같은, 무(無)의 방대한 장(場)으로 본다. 그래서 지금 나는 모든 것을 찾고 있는 중이다. 중요한 것, 확립되는 원리들, 또는 올바른 것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전체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해답이 바로 일의 위임 자체에 있다고 본다. 세계는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졌지만, 각 부분은 제작자로부터의 전체적인 위임을 요구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지역적인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 차이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사람들, 영향력있는 분야를 구축하는 사람들, 지적 자산을 늘리는 사람들, 사례를 생산하는 사람들, 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언덕에 추가하는 사람들은 나의 표를 얻는다.  


소르킨 :
  왜 새로운 영역인가? 옛 영역은 어떤가? 확대된 문화 분야에 편입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차라리 중력, 은신처, 그리고 행복 같은 기본적인 것들에 집중하자. 가상 장소와 프로토콜은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또 덫이기도 하다. 몸은 여전히 건축의 잣대이다. 그것은 건축에서 분리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