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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TA > 지구촌 > '나의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의 영화)


 

 

 

후의 기념비가 건물이 아닐 때

 

 

허버트 머스햄(HERBERT MUSCHAMP) / 뉴욕타임스(2003년 11월 9일자)

 

 

 

 

  자신의 아들 나타니엘 칸(Nathaniel Kahn)이 만든 찬란한 일대기 영화의 주인공, 루이스 칸(Louis Kahn), 이제 건축은 연회가 되었지만, 1974년 죽은 그는 연회에 유령으로나 참석할 뿐이다. 영화가 분명히 말해주듯이, 루이스가 생전에 건축의 연회를 주최하였다 한들 그는 나쁜 주최자였을 것이다. 그는 건축을 통달하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그에게는,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이 화려한 기쁨을 누리는 그런 미적 잔치를 벌일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나의 건축가’라는 제목의 이 경이로운 영화는 건축이 음악, 회화, 문학 또는 무용보다 덜 창조적인 분야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중지시켰음이 틀림없다. 나는 한 건축가의 내밀한 삶 혹은 건축 그 자체를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통찰력있게 묘사한 것을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다.

  영화제작자가 자신의 영혼을 탐색함으로써 영화는 깊이를 갖게 되었다. 루이스가 죽었을 때 나타니엘은 11살이었다. 아버지의 건물들은 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매개물이 되었다. 그에 따라 그는, 건물이 사회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에 관해 개인적으로 성찰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7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은 상황을 나타니엘이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영화는 쓸쓸하게 시작된다. 그는 뉴욕의 펜실베니아역 남자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마땅한 신분증이 없어서 그의 시신은 시 시체보관소로 보내져 3일간 방치되었다. 칸은 파산했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당시의 건축가로 그보다 높이 존경받았던 사람은 없다. 칸의 전문가로서의 성취와 혼란된 사생활 사이의 불일치는 영화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다.

  칸의 삶이 거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만큼 복잡했음이 드러난다. 그는 한 여성과 결혼했고 세 가족을 유지했다. 그 트리오의 멤버들은 칸의 장례식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필라델피아(매우 보수적인 도시임. - 역자 주)에 당시,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런 별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상상하기 힘들다. 우애에도 한계가 있다.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인 나타니엘은 아버지가 이룬 가족을 거꾸로 추적해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1960년대 중반, 나는 루이스 칸의 자녀 중 한 사람과 알고 지냈다. 나는 당시 다 큰 사람들이 무엇에 관해 속삭이는지 전혀 몰랐다. 속삭임이 있었지만, 그것이 건축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칸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준 첫 건물인 펜실베니아대학 리차드 의학연구소(1960)가 바로 바라보이는 지역으로 이사한 1965년에야 칸의 작품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유명한 사람의 옆집에 사는 것과 같았다. 물론, 그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섹스보다는 유명세였다.

  ‘나의 건축가’ (맨해튼의 필름 포럼(Film Forum)에서 수요일에 개막)는, 도덕적 분위기는 물론 도시에 관점에서, 대체로 필라델피아에 관한 이야기이다. 칸의 작품은, 전후 미국 전역의 도시들에서 중산층이 도심을 떠나 교외로 이동한 시기, 곧 교외화(white flight) 시기에 무르익었다. 필라델피아 도심의 침식은 특히 고통스런 것이었다. 왜냐하면 필라델피아는 오랜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도시였음을 자랑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필라델피아에는 건축과 도시계획 분야의 두 거인이 있었다. 칸 그리고 전후 미국 계획의 다니엘 번함(Daniel Burnham(1846 ~ 1921); 시카고 학파의 대표적인 건축가 - 역자 주) 격인, 전설적인 에드먼드 베이컨(Ed Bacon)이 그들이다.

  92살의 나이에도 저돌적인, 귀엽게 심술궂은 베이컨 씨가 미국 도시의 원로 지도자 몇몇 사람과 함께 조연으로 여기에 출연한다. 베이컨 씨는, 그가 나온 장면에서, 전후 필라델피아 계획에서 칸을 배제한 것을 변호하도록 요구받았다. 베이컨 씨는 칸이 근시안적이었다고 비난한다. 칸은 천재적인 개별 작품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역의 요구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점은 잘 선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그 지역에 칸의 건축이 부족한 것을 이제 와 후회할지도 모른다. ‘건축여행(archi-tourism)의 시대에 많은 도시에서는, 도시의 위축되는 경제적 기반을 떠받치기 위해서 문화적 유인 요소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는데, 훌륭한 건물은 그런 요소 중 하나이다.  

  영화가 주로 아버지에 초점을 맞춘 반면, 나타니엘은 주변부에 항상 나타난다. 예술은 삶을 닮는다. 이것이 반대로 나타난다면(예술이 삶을 닮지 않는다면 - 역자 주)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법률상 나타니엘은 사생아였다. 심리학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사생아보다 더 나쁘다. 그러나, 영화는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에 대해서는 판단하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평범한 사생활을 성공적으로 꾸려간 훌륭한 남성 건축가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도로 사회적인 예술(건축 - 역자 주)에 이끌리는 것은 바로 그들이 생명이 없는 대상물이나 추상적인 아이디어에만 진실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칸의 (가족을 돌보지 않은 - 역자 주) 행동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인물들의 인생행로에 이끌려 들어온 이들이 반드시 희생자(또는 유일한 희생자)는 아님을 암시한다.

  여성들은 1950년대와 60년대, 일부일처의 관습 속에서 많은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 어찌 내밀한 삶을 만든 것(남성들 - 역자 주)을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부정하는 것(여성들 - 역자 주)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나의 건축가’에서는 여러 가지 애매함들이 자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멋진 장면이 나온다. 캘리포니아의 라 졸라(La Jolla)에 있는 솔크 생물학연구소(the 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의 큰 중정에서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나타니엘의 모습이 등장한다. 1965년 완공된 이 연구소는 대개 경외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20세기 건축의 걸작이다. 영화촬영 기법에서 그런 경외감이 느껴지지만, 나타니엘이 그 중정의 완전무결한 빈곳에서 곡선을 그림으로써 경외감은 다소 손상된다. 그 순간은, 자유에 대한 욕구로서, 아버지가 없는 공허함으로부터 생긴 기억, 때때로 압도해왔을 것이 분명한 어떤 기억을 떠올려준다. 

  거기서 스케이트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은 포스트 모더니스트이다. 그는, 필립 존슨 같이, 칸의 엄숙함을 탈출하여 숨을 돌려야했던 모든 건축가들의 대리자이다. 조연으로 나온 로버트 스턴(Robert A. M. Stern)은 칸을 떠받드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나, 칸을  떠받드는 사람들은 상업적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가진 스턴 씨 세대(그런 성향)의 건축가들은 아니지 않은가?

  이 영화는 칸의 건물들에 대한 장대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여행에는 솔크 연구소 외에도 뉴 햄프셔주 엑스터(Exeter)에 있는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Phillips Exeter Academy)의 도서관(1972), 포트 워쓰(Fort Worth)에 있는 킴벌 미술관(Kimbell Art Museum; 1972), 그리고 뉴 헤이븐에 있는 예일 대영미술센터(Yale Center for British Art; 1974)가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나타니엘은 아버지가 방글라데시의 수도에 설계한 거대한 정부청사단지(1983)를 방문한다. 기술 문명의 환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나타니엘은 마침내 아버지와 재회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적절한 시기에 개봉된다. 오늘날 많은 건축가들은 칸이 포착한 서정성을 전하려고 한다. 프랭크 게리는, 영화에서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그런 건축가들을 대변한다. 이렇게 서정성을 중시하는 것은, 알도 로시 그리고 그가 저술과 설계에서 탐구한 ‘명백한 감성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상적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건축가’는 칸이 근대적 사고의 냉정한 합리성에서 벗어나 주관적 진리에 대한 현대적 추구로 방향을 전환시킨 중심인물이었음을 잘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