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것의 깊이를 읽는 두 가지 시선 ㅣ 최익현기자 (bukhak64@kyosu.net) ㅣ 2011-07-13 ㅣ [교수신문]

『한국 전통마을을 찾아서』 출간한 한필원 한남대 교수

행정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한국의 ‘전통마을’은 대략 3만6천여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보전성과 공간 미학이 뛰어난 곳은 몇 곳이나 될까.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휴머니스트, 2011.7)를 저술한 한필원 한남대 교수(건축학부)에게서 답을 찾는다면, 12곳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옻골마을, 한개마을, 낙안읍성, 성읍마을, 하회마을, 강골마을, 양동마을, 도래마을, 닭실마을, 원터마을, 외암마을, 왕곡마을을 차례로 훑어가는 저자의 눈길과 발길에는 물질(물리)적 현상을 ‘정신적 차원’에다 결합하려는 욕망이 묻어나온다. 그는 전통마을을 물리적 공간과 무형의 비물리적 가치가 결합된 특정한 장소로 읽어낸다.

한필원 한남대 교수(건축학부)

‘건축 순례‘를 표방하고 거의 26년을‘전통마을’을 연구해온 저자는 1961년생, 80년대 학번이다. 이런 시대적 환경 때문에 그는 80년대의 자기 정체성 모색이란 학문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이른바 386세대로서 그가 주류 행세를 하던 ‘서양건축’을 ‘삐딱한’시선으로 보면서 ‘전통마을’을 누비고 다닌 것도 이해가 된다. 1985년 대학원에서 그는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송인호 서울시립대 교수를 선배로 만나게 된다. 그는 이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지도교수는 이광노 서울대 교수였다.

당시 건축학 대학원에는 마땅한 교재가 없었다. 서유럽 전통에 기반한 건축학 교재들이 있었지만, 삶의 무대, 생활방식을 지지하던 조건이 우리와 달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건축은 삶의 방식 위에서 태어나는데, 그들의 원리 위에 선 ‘건축’이 우리 논리에 와 닿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전통 건축’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그런데 전통건축은 불국사, 소수서원 등과 같이 개별적인 점으로 남아 있어서 뭔가 연속적인 동선, 삶의 무대로 확장한 시선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었다. 대학원에서 현지 실측조사를 나간 것도 이런 ‘네트워크의 필요성’때문이었다. ‘전통마을’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현지답사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80년대 대학원 시절부터 ‘전통건축’에 눈돌려

‘전통마을’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이렇듯 시대와의 조우 속에서 형성됐다. 기존 서구 건축이론의 잣대에서 벗어나 한국의 전통마을에 내포된 철학과 원리들을 찾는 작업을 통해 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보편적 이론으로서의 ‘전통마을론’을 강조한 배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우리 것 제일주의’를 내세운 것은 아니다. “전통마을은 전근대 사회의 사상, 경제, 생활 이것을 지지했던 원리에 맞춰서 고안되고 발전된 공간이다. 21세기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슨 의미를 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문화적 수구’로 비쳐질까 우려하는 것 같았다. ‘옛것은 좋은 것’이라는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폐쇄적 작업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는 사상·문화·사회·환경이라는 네 개의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시선을 통해 열 두 마을을 답사하면서, 가감 없이 전통마을의과거와 현재를 그려냈다.

“최근 왕골마을 사례는 참 안타깝다. ‘전통마을’의 의미를 협소하게 해석해서, 근대화시기 건축물인 ‘농협창고’를 철거하고 있더라. 전통마을은 시간적 연속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건축물을 철거하면 이런 연속성이 사라지고 만다”라면서 안타까워 한다. 세계문화유산 등록 바람도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계문화유산 만든다고 놀이터 만들고, 기념관 세우고, 가짜 한옥 세우고 하는 현실도 그리 탐탁치 않다. “세계문화유산 등록 때문에 전통마을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눈에 거슬린다고 자꾸 없애려고 하는 이상한 논리”를 외암마을에서 읽어내기도 했다. 외암마을은 전통시대에 쌓은 돌담이 인상적인 공간이다. 전통시대 돌담은 순수한 ‘지역기술(local technology)’로 구축된 것이다. 붕괴된 돌담을 인위적으로 멋있게 만들다보니 잘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적 요소가 너무나 개입돼 있는 게 문제다. 그는“전통마을도 지속가능성이란 시대적 가치에서 본다면, 다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비판도 빠뜨리지 않았다.

한 교수는 전통마을이 성리학적 위계질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는 이러한 성리학적 이념이 공간의 ‘전후개념’으로 잘 응축돼 있다고 읽어냈다. “이것은 중심-주변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기독교사상의 서구 건축이론과 다른 점”이다. 전후개념은 천인합일의 사상이 녹아 있다. “현대건축에서 자연과 인간 질서는 늘 대립한다. 환경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질서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특정 지형은 현대건축에서 지워져야 할 대상이 됐다.” 반면에 전통마을에 나타나는 인간과 지형은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고 해석한다.

새로운 건축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그의 ‘전통마을론’은 과연 보편적 이론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예민한 문제다. 그는 전통마을에서 발견한 논리를 단순한 이론으로 묵혀두지 않았다. 통영 한산도 문어포 마을을 문화·역사마을로 만드는 현대적 과제도 수행했다.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문어포 마을에서 새로 설계한 집과 오래된 집을 구별해보라고 했다. 쉽게 구별해내지 못하더라.”그는 해안가 문어포 마을이 급경사를 이룬 지형임을 간파해 지형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기보다 오래된 마을 안에서 자라고 유기적으로 성장하고 소멸하는 흐름을 읽어내려 했다. 과연 그런 생각이 얼마큼 실현됐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경북 경주 양동마을 전경 /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건축학자가 마을공간을 분석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양동마을은 지형의 변화가 큰 마을로, 높은 곳에 양반주택, 낮은 곳에는 그에 딸린 가랍집들이 배치되었다. 등고선에 비스듬히 길을 내서 되도록 경사도를 줄였다. 왼쪽 기와집은 볼록한 지형에 낮게 지어진 관가정이고, 오른쪽 기와집은 오목한 지형에 과장된 몸짓으로 지어진 향단이다. 여기서 집들이 지형을 잘 해석해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진제공=한필원 교수

혹시라도 한 교수의 이 책을 접하고 열두 마을을 탐방해보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유용한 귀띔을 하나 던져줬다. 한옥이 자연 경관과 잘 어울려 아름다운 곳이라면 양동마을을 찾을 것, 우리 도시의 초기 모습을 보고 싶다면 낙안읍성을, 자연 경관과 조화한 공간은 닭실마을을 보라고 말했다. 그는 전통마을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 하나를 더 조언했다. 마을만 보기보다는 마을과 관련된 광역의 장소들에도 눈을 돌리라는 주문이다. 닭실마을 충재종택은 중종때 문신 권벌(1478~1548)과 관련 깊다. 봉화에 주거를 튼 그가 18km 떨어진 춘양에 한수정이란 정자를 세웠을 때, 그것은 충재종택의 ‘청암정’과 같은 원리 위에 구축한 질서였다. 이렇듯 광역의 장소들까지 머리에 담으면서 전통마을을 답사할 때, 옛사람들의 사상과 삶, 문화가 어떻게 오늘 우리 눈앞에 ‘재현’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체감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황금비로 간주되는 ‘등각나선’을 충재종택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체감의 힘에서 가능했으리라.

현지 실측 도면 등 풍부한 자료 수록

“근대이후 한국 건축이 ‘비물질적 측면’을 놓쳤다는 게 가장 문제다. 현대 건축은 모든 것을 양적으로 계산한다. 현대의 호모 칼쿠루스(Homo Calculus)처럼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정서적인 것은 측량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일 뿐이다. 건축의 핵심은 사고의 구축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론과 실천의 접합을 고민하는 학자이자, 현장 건축가의 두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생각이 정교하고 탄탄하게 구축되지 않으면 좋은 건축을 하기 어렵다. 이제 건축은 치유의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자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연대성을 회복하는 일 말이다.”

현대 건축 설계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던 1980년대, ‘전통마을’로 눈을 돌린 그날의 선택은 그의 운명을 이제 돈과는 거리가 먼 ‘연구자’로 내세우고 말았다. 후회가 없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돌담을 지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펼쳐지는 한옥의 빼어난 광경도 재미있지만 대문 밖에 펼쳐지는, 확장된 자연 공간과 대화할 수 있는 있다는 점이 그를 흥분하게 만든다.

빼놓을 수 없는 이 책의 특징 하나. 책 곳곳에 실측 자료인 전통마을 도면을 그대로 실었다. 그가 김천 원터마을을 다시 찾아갔을 때, 한 작은 종가집에서 불이 나서 사랑채가 홀랑 타버린 일이 있었다. 그가 실측했던 ‘도면’을 활용한다면 불타 사라진 그 종갓집 사랑채는 쉽게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는, 1980년대부터 함께 했던 무수한 대학원생, 연구자들의 공동 결실이기도 하다.

* 덧붙이는 글. 사실 저자는 2004년에 『한국의 전통 마을을 가다 1․2』(북로드)를 상재한 바 있다. 역시 사상 문화 사회 환경 등 네 개의 주제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마을을 각각 세 개씩 골라서 열두 마을을 답사한 내용이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 바로 그 책의 확장편인 셈이다. 한 교수는 2004년 출간 이후 마을 연구에서 얻는 지식을 실무작업에 적용하고,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는 그는 책의 내용을 보완하기로 마음 먹게 됐다.

마을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 한국 전통 마을의 본질을 정리하는 '총론'을 첨가한 것이라든가, 독자들이 전통마을을 답사하는 것을 전제로 '답사 요령'을 덧붙인 것이 2004년 저술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2004년 저술이 2002년까지의 연구 성과를 담았다는 것, 그러니까 책을 쓴 지 10년 가까이 지나면서 전통마을에도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난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하고자 했다는 '시간의 요청'을 그가 의식한 부분이다. 한 교수는 "역시 마을은 살아 있었다. 그래서 도면을 추가하거나 새로 그리고, 내용도 적잖게 고쳐야만 했다"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보완작업은 7년에 걸쳐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