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미학이 깃든 마을 열정적 연구분석에 감탄 ㅣ ㅣ 2005-1-14 ㅣ [문화일보]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좌표를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옛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서 진보된 삶을 열어 갈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건강을 위해 서구의 ‘근대적인’ 식단을 버리고 김치와 청국장을 다시 찾는 음식 문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음식에 조상들의 놀라운 지혜가 깃들여 있다는 식의 피상적이고 정서적인 접근만으로는 이 같은 ‘밥상 혁명’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김치와 청국장의 성분과 효능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입증해 낸 전문가들의 실증적인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통에 대한 탐구는 완상과 찬탄을 넘어서 그것에 담긴 가치를 과학적,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작업으로 이어질 때 참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조타수 노릇을 할 수 있다.

한필원 교수는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 주거 양식을 조사하고 해석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는 건축학자다. 옛 사람들의 삶터에 숨어 있는 보편적인 정신과 질서를 밝혀냄으로써 서구의 ‘근대적인’ 건축 논리를 극복하고 더욱 진보된 주거 공간을 창조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 마을을 가다’는 그 20년 연구의 첫 결실이다. 책은 옻골마을, 한개마을, 낙안읍성, 성읍마을, 하회마을, 강골마을, 양동마을, 도래마을, 닭실마을, 원터마을, 외암마을, 왕곡마을 등 마을 공간들이 의미 있는 질서를 가지고 있는 12개 마을에 대한 탐사와 연구, 대화와 사색의 보고서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이 책을 통해 건축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휴일과 방학도 잊은 채 연구실 학생들과 함께 낡은 카니발을 몰고 다니며 마을 구석구석을 일일이 조사해 실측 도면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주민들을 취재하고, 연못이 그 마을에 가장 적합한 하수 자연 정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아이스박스에 물의 시료를 담아 지고 다니는 현장 답사자이며 과학자였다. 특히 26채의 가옥이 조금씩 서로 양보하여 조망과 일조의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하고 있는 닭실마을의 가옥 배치가 황금비를 보여주는 도형과 정확히 합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장면에서는 깊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축가는 또 인문학자이며 예술가였다. 책에는 수백년 동안 지속된 우리 삶터에 밴 정신과 지혜를 건축학 이론만이 아니라 철학, 지리학, 역사학, 생태학을 넘나들며 해석해 내고 마을길을 거닐며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 환경 친화적이고 지속 가능한 삶터, 서로 다른 계급과 집단의 공존, 디자인의 상징성과 기능성 같은 문제를 깊이 사색한 자국들이 선연히 드러나 있다.


공자는 “옛 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고”, 배움과 사색이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앎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책을 읽는 동안 내 귓가에는 전통과 미래, 실증과 사색, 전문성과 대중성의 이중주가 조화롭게 울려 퍼졌다. 또 책을 덮고 나서는 40대를 살아오면서 새로 꾸고 있는 꿈, 삶의 결이 맞는 이들과 어울려서 우리의 생각이 담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고 싶다는 꿈을 더욱 당차게 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