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골목길에서 마주한 오래된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 건축학자 한필원, 그는 왜 오래된 도시에 주목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도시는 현대사회의 표상으로, 현재 이 문화적 아이콘에 포섭되지 않은 물질문명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아직 마땅한 ‘도시론’이 없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대한 관심과 분석은 있지만, 한국의 고유성을 다채롭게 담고 있는 지방의 작은 역사도시에 대한 미시적 분석이 전무한 현실에서, 건축인문학자 한필원 교수가 오래된 지방도시 아홉 곳을 찾아 골목골목 순례하며 현장에 바탕을 둔 도시 이론을 펼쳐냈다.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를 통해 오래된 공간과 장소, 그곳에 깃든 이야기와 조상의 지혜를 기록하고 분석하고 해석해온 그가 이번에는 오래된 도시, 곧 ‘역사도시’로 연구 대상을 옮겼다. 도시민 대다수가 실제 생활공간인 도시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상적 공간을 따로 꿈꾸고 있는 현실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 도시는 양적 성장을 멈추고 질적 발전을 지향해야 할 시기에 도래했다고 본 저자는, 그 해답을 오래된 도시 곳곳에서 발견한 지혜와 교훈, 그리고 아이디어에서 찾고자 했다. 기성의 도시 및 건축 이론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현장에 바탕해야만 제대로 된 도시 읽기가 가능하다고 본 그의 믿음은 7년간의 도시 답사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책 《오래된 도시의 골목길을 걷다》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발길을 사로잡은 아홉 도시, 곧 곡선의 강과 직선의 중앙로가 교차하는 밀양, 바다와 예술가들이 빚어낸 도시 통영, 막다른 골목이 살아 있는 양반도시 안동, 봄을 간직한 물의 도시 춘천, 휴머니즘을 간직한 상업도시 안성, 외래 풍경을 안고 있는 오래된 포구도시 강경, 예(藝)와 무(武)라는 두 개의 문화바퀴로 도시를 움직이는 충주, 한옥의 전통을 간직한 전주, 천년 고도 나주이야기가 담겨 있다. 역사가 긴 도시일 것,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심부를 지닌 도시일 것, 그리고 현대도시로서의 매력과 잠재력을 지닌 도시일 것이라는 저자의 세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이곳에서는 공동체 생활이 사라지고 개인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현대 대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공간과 장소들을 만날 수 있다. 개별 건축물이 아닌 도시 전체를 조망하며 구조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특징인 이 책은 골목골목을 누비며 각 도시의 존재 방식과 논리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마다의 공간에 ‘서사’와 집단 기억의 퇴적층을 지니고 있는 오래된 도시를 그 자체로 훌륭한 텍스트라 여긴 저자는 아홉 도시를 꼼꼼히 ‘읽고’ 나름의 ‘해석’을 펼쳐나간다.
오래된 도시에 켜켜이 쌓인 시간과 장소의 변화 과정을 읽는 일은 무척 어렵다. 전근대시기와 근대, 그리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현대의 개발 과정이 뒤섞인 공간에서 각 도시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여러 차례 이어진 도시 답사를 통해 골목과 골목을 누비며 한 켜 한 켜 그 궁금증을 풀어나간다. 지금은 잊힌 오래된 유물이나 마을의 전설을 찾아나서면서, 또는 우연히 들른 막다른 골목에서 발견한 한옥과 근대 건축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과 서사를 따라가면서 도시를 읽어나간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도시 읽기에 있지 않다. 아홉 도시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해당 도시를 읽고 제대로 된 맛과 멋을 풀어낸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의 문제를 진단하고 미래 도시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건축학자의 제언을 아낌없이 들려준다는 데 있다. 소소하고 구체적인 제언까지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여러 차례 이어진 도시 답사는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개별 도시의 문제의식을 해당 도시의 길 위에 자연스레 풀어내게 도와주었다. 건축학자 한필원의 아홉 도시를 향한 애정과 열정은 도시의 가로축을 중심으로 중심가에 놓인 건물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그리고 옛 지도와 현재 지도, 저자가 직접 스케치한 도시 풍경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이제 우리는 우리 도시를 기록한 하나의 초상화이자 미래의 청사진을 갖게 되었다.


2. 오래된 도시를 ‘읽는’ 다양한 ‘방법’들

―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휴머니즘

오래된 도시를 읽는 저자의 독법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저자는 문화유적, 랜드마크 등 개별 건물에 대한 현상적 분석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가시권에 놓고 살펴본다.
먼저, 도시의 중심과 경계, 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즉, 행정 중심지로 시작한 역사도시의 오래된 공간인 객사와 동헌, 성벽 등의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과거 도시 공간의 중심지와 경계를 확인하고, 도시 중심지를 관통하는 동서가로와 남북가로를 통해서는 개별 도시의 일상생활의 축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변화했는지를 더듬어나간다. 대부분의 남북가로에는 관청과 같은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고, 동서가로는 상업가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제강점기 상업가로에 금융시설들이 들어선 나주에서는 밀집한 근대 건축물을 살펴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도시의 지형과 물길을 확인하면서 높은 지대에 형성된 도시 공간의 특징을 찾아내고, 물길이 나누어놓은 공간의 변화와 역동성에 주목하며, 이들 지형과 물길이 만들어낸 도시의 흐름, 그리고 마을과 공동체의 독특한 분위기를 읽어낸다. 언덕에 주거지가 형성된 춘천과 통영에서는 골목과 집들이 놓이는 방식이 등고선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과거에 교통로로도 활용된 물길이 도시에 선사한 편안함은 대부분의 오래된 도시에서 맛볼 수 있다.
해당 도시와 연관된 인물과 얽힌 이야기가 남아 있는 장소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는 방법도 권장한다. 춘천에서는 박수근과 권진규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통영에서는 이중섭과 《김약국의 딸들》과 같은 문화 예술작품 미리 살펴보고 찾아간다면, 더없이 풍부한 도시 답사가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저자가 주목한 도시 공간 중 하나는 바로 ‘골목’과 주택 및 주거지의 모습이다. 의례가 행해지던 공간인 가로축과 달리 도시의 골목들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면(面)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거주의 장소로, 도시생활이 빚어내는 고유한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다. 특히 이 책은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막다른 골목길’을 우리나라 도시 공간의 특징으로 살펴본 점이 두드러진다. 막다른 골목은 도시 공간의 활용 면에서는 일면 불리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불규칙한 ‘면’의 구성 덕분에 도시를 더욱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공간으로 만들어나갈 뿐 아니라, 아늑하고 내밀한 습성을 지니고 있는 편안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골목 덕분에 도시 공간이 적절한 규모의 작은 공동체 영역으로 나뉠 때, 즉 ‘인간적인 척도(human scale)’를 지닐 때 도시의 휴머니즘이 가능하다고 본다. 한편, 한국의 역사도시에는 주상복합 건물이 많은데, 충주 안성 강경의 주상복합 건물에서 사적인 생활 영역을 확보한 과거의 방식을 살펴본다면 앞으로 고밀도 도심에 적합한 다양한 주거 유형을 개발하는 데 귀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도시 답사 노하우 중 하나는 ‘자전거’이다. 도심부가 작은 오래된 도시를 답사할 때는 걸어도 좋지만 자전거를 활용해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전거로 답사한 충주에서는 예와 무라는 두 개의 문화바퀴를 통해 도시를 살펴본 점이 흥미롭다. 저자가 들려주는 도시 답사 노하우는 이 책에 실린 아홉 도시뿐 아니라 지방의 작은 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도시 독법을 제공한다.

한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안동은 막다른 골목이 발달했고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안동의 막다른 골목들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기도 하고 조금 더 넓기도 하다. 또 몇 발짝이면 끝날 만큼 짧기도 하고 좀 길기도 하다. 곧게 뻗기도 하고 부드럽게 휘어지기도 한다. 등고선을 따라 평평하기도 하고 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이렇게 안동의 막다른 골목은 ‘인간적인 척도(human scale)’를 가지고 있으며, 제각기 모양이 달라서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또 그만큼 다채로운 도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그것은 짧은 시간에 계획해 만든 현대의 도시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요소다. (중략) 막다른 골목 앞에서는 판단을 해야 한다.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호기심이 들어도 볼일이 없으면 들여다본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무심코 들어갔다가는 그곳 사람의 눈총을 받거나 개의 사나운 인사를 받아야 한다. (중략) 이렇게 그곳은 상호감시를 통해 사람을 걸러주는 안전망이기도 하다. 이는 어디론가 이어지는 통과 골목과 다른 점이다. 다양한 모양의 막다른 골목은 그 길에서 다양한 한옥들과 만난다. 집의 모양이 일자·ㄱ자·ㄷ자 등으로 다양하고, 마당도 네모나기도 하고 좁고 길기도 하다. 언제나 마당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한옥은 건물 안에 모든 공간을 집어넣으려는 양옥에 비해 공간을 개방적으로 구성한다. 이런 개방적인 주택이 도심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막다른 골목 덕이다.

― <안동, 막다른 골목에 살아 있는 양반도시의 품격>(100~102쪽) 중에서



3. 역사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디자인하다
― 건축학자가 제안하는 오래된 도시에 걸맞은 성장의 방향과 가능성

저자의 지방도시 순례는 현장을 기반으로 한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다만, 그것이 문학도로서가 아니라 건축학자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건축으로 사고하며, 그 안에 담아야 할 도시의 색깔과 휴머니즘, 그리고 오래된 지혜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써나간다. 통영 세병관 앞 주차장에 대한 짤막한 소감에서부터 충주라는 도시를 예와 무의 도시로 키워나가자는 거시적인 제언, 도심지 한옥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 매우 다양하다. 해당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목소리이다.

밀양강을 바라보며 한국의 소중한 역사도시 밀양이 나아갈 길은 타자화된 자연을 다시 ‘우리’ 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관아 복원사업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도시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관아를 복원해봐야 활용하기도 어렵고 관광객을 지속적으로 끌기도 어렵다. 관아 건물이 보고 싶어 어떤 도시를 반복해서 찾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그러나 강물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도시가 있다면, 그래서 맥 빠진 현대인들이 삶의 활력을 되찾는 도시가 있다면 그들은 아마 그곳을 자주 찾을 것이다.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맥이 빠지게 되어 있으니까.

― <밀양, 곡선으로 흐르는 강,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45쪽) 중에서


통영은 오감을 자극하는 도시다. 우리가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감각을 동원해 만나고 싶은 도시도 사실 드물다. 세병관 뒤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대향이 그랬듯 이상향을 그리고, 바닷가를 거닐며 백석이 그랬듯 “조개 울”음도 듣고, “김 냄새 나는 비”를 맞을 수도 있다. 세병관 마룻바닥에 앉아 부드럽고 따스한 나무의 촉각을 느끼고, 부둣가로 가서 맛있는 해산물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오감의 도시를 자동차가 위협하고 있다. 오직 편리함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병관 코앞에 커다란 주차장을 만들어 도시의 감각을 앗아가려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자동차의 도시가 되면 그것은 우리가 찾고 싶은 통영이 아니다. 자동차를 배제하고 조금 느린 도시, 조금 불편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통영의 살길이다.

― <통영, 바다와 예술가들이 빚어낸 도시의 지혜>(82쪽) 중에서


동·서문로의 공공건물에는 전통 또는 양반의 이미지를 표현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 방식은 다양하나 서에서 동으로 갈수록 노골적이다. 안동성소병원에서 갓의 이미지가 풍기더니 안동시 보건소에서는 확실하게 건물에 갓을 씌웠다. (중략) 안동이 양반의 도시라 해서 굳이 현대 건물에 한식 기와지붕을 얹거나 갓을 올려놓을 필요가 있을까? 역사도시 안동의 지역성이 그런 형태 요소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막다른 골목과 그 짝인 한옥의 다양성에서 ‘안동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막다른 골목과 한옥, 이들은 우리의 역사도시 어디에도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도시는 보기 드물다. (중략) 지킬 것은 꼭 지키면서도 현실 조건과 필요에 따라 다양성을 인정하는 안동의 정신에 그 도시만의 지역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 <안동, 막다른 골목에 살아 있는 양반도시의 품격>(115~116쪽) 중에서


해마다 11월 김장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많은 관광버스가 강경으로 몰려와 가게 앞은 물론 도시의 골목들을 메운다. (중략) 관광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은 젓갈만 볼 뿐 도시의 빛〔光〕을 보지〔觀〕 않는다. 그들은 관광객이 아니라 쇼핑객이다. 젓갈 냄새를 맡으며 구경할 만한 역사도시의 풍경을 되살리고 가꾸는 일, 그래서 젓갈가게 안에서만 맴돌다 다시 버스에 오르는 쇼핑객들을 도시 공간으로 불러내 도시의 체험자로 만드는 일, 이것이 ‘강의 풍경’ 도시에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도시의 전략은 단계적으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중앙초등학교에서 시작해 대동전기상회(1955년건축)로 이어지는 중앙로는 강경다운 모습을 여전히 짙게 간직하고 있으니 중앙로에서 먼저 시작하면 좋겠다. 먼저 이 가로의 고유한 질서가 무엇이었는지 발견하고 그것을 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등록문화재인 중앙초등학교 강당(1937년건축)을 가로에서 인지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만들고, 금성커피숍을 1940년 당시 재미있는 다방의 모습으로 재설계하면 좋을 것이다. 또한 ‘대성알미늄’ , 신광양화점·화신양복점(1954년건축), 대동전기상회 등의 2∼3층 건물들이 단층건물과 번갈아 등장하면서 가로의 리듬감을 살려주면, 중앙로는 강경의 오래된 외래 풍경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이 꼭 한번 걷고 싶은 가로가 될 것이다.

― <강경, 오래된 포구도시의 외래 풍경>(230쪽) 중에서

불쾌지수가 매우 높았던 날의 자전거 답사가 뜻밖에 상쾌했던 것은 한결같이 친절한 충주 분들 덕분이었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우체국 건너편 예총회관 앞 둥근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자전거를 바라보자니 두 바퀴에 충주의 모습이 겹쳐진다. 충주의 도시 문화를 움직여온 것, 그리고 앞으로 움직여갈 것은2개의 문화바퀴, 곧 예(藝)의 앞바퀴와 무(武)의 뒷바퀴일 것이다. 자전거가 두 바퀴로 굴러가듯이 충주가 앞으로도 예와 무의 두 바퀴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예와 무, 이들이 과연 한 도시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 무(武)란 지(止)+과(戈), 곧 창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무란 결국 싸움을 멈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마지막에 문(文)이나 예(藝)로 승화되어야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충렬사에서 시작된 무의 축은 도심에서 예로 전화(轉化)되고 다시 예의 축으로 이어져 탄금대에서 절정을 이룬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 <충주, 도시를 움직이는 두 개의 문화바퀴>(265~266쪽) 중에서

전주 한옥마을을 삶터로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상점, 전시관 같은 주거 이외의 용도를 큰 가로변에만 선(線)으로 위치시켜 이 건물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골목을 따라 들어가는 마을 안쪽은 사적인 주거 영역으로 유지해야 한다. 개방적인 한옥에서 사적인 영역을 만들려면 담을 잘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마을에서 담은 사적인 공간을 구성하고 차분하고 통일된 마을 분위기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담을 허물고 밖으로 열린 큰 마당을 두는 한옥형 전시관을 더 이상 지어서는 안 된다. 맛있는 고추장이 없는 전주비빔밥을 생각할 수 없듯이 그런 건축은 제대로 된 한옥이 아니다.


― <전주, 한옥이 지켜온 도시의 전통>(300쪽) 중에서


4. 동아시아 역사도시 속 한국의 역사도시를 말한다
― 새로운 역사도시를 꿈꾸며

오래된 도시, 즉 역사도시는 전근대기부터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살아 움직이는 도시로, 문명의 산물인 동시에 문명을 발전시켜온 공간적 토대이다. 한국의 역사도시는 《주례(周禮)》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의 원리와 동일한 구조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도시와 그 뿌리를 같이한다. 공적 공간인 너른 중정과 이를 둘러싼 중고층 집합주거 복합건물이 일정한 블록으로 이루어진 서유럽의 도시 공간과 달리 동아시아의 도시는 주요 가로에 의해 도시 공간이 블록으로 나뉘고, 불록 내부는 골목들로 조직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구체적인 도시 공간 조직은 현실적인 조건과 지역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동아시아 역사도시들 저마다 모습이 다르고 그 안에 축적된 이야기도 다르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역사도시의 특징을 뽑으라면 도시의 면이 불규칙하고 유기적인 골목으로 조직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저자는 한국적인 특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역사도시를 제안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특집 <한국의 역사도시를 말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역사도시의 오래된 모습을 모두 지켜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역사도시란 성장을 멈춘 도시가 아니라 부단히 진화하는 도시여야 하므로 그런 전면적인 보존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 앞으로 역사도시는 어떻게 변화해가야 하는가? 그 바람직한 방향은 공간구조의 이원성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선을 따라 개발이 일어나도록 하고 골목과 주거로 구성되는 도시의 면을 지속시킨다면, 한국의 역사도시는 세계성과 지역성을 동시에 갖춘 현대도시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현재 한국의 역사도시에서 새로운 상황과 조건에 맞는주거 유형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과거의 지역 조건에 맞게 형성된 재래주택이 현대의 도시 구조와 생활을 담는 것은 이미 어려워졌고, 그 이후로도 특색 없는 양옥들만 지어졌을 뿐 역사도시다운 집들이 모색되지 못했다. 몇몇 역사도시에서는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한국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 유형이 되어버린 아파트가 역사도시에 전면적으로 침범한다면 역사도시의 미래를 더 이상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도시 조건에 맞는 주거 유형을 정립하는 일은 새로운 시대에 한국의 역사도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나는 이 과제를 푸는 실마리를 역사도시의 현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안성에서는 가로를 따라 연속되는 문간채의 진화를 이해함으로써 저층 고밀도 중소도시에 적합한 ‘수평적인 주상복합 주거’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통영에서 집 안에 서로 다른 높이의 마당을 갖는 경사지 주택들을 보며 지형 변화가 많은 한국 도시에 필요한 ‘경사지 주거’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모든 도시 이론은 현상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모든 도시 문제의 해법은 현장에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 <특집, 한국의 역사도시를 말한다>(353~3543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