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한국의 전통주거관(전반부)

제 2 장 한국의 전통 주거관

* 학습의 목표

일반적으로 주택은 거주자에게 소우주(microcosmos)로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식된다. 주택에는 거주자의 우주관과 그를 둘러싼 사회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 주거관을 이해하는 것은 전통사회의 가치관과 제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며, 역으로 주거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특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 장에서 우리는 주거문화의 개념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지식과 함께 전통 사회(주로 조선시대의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통 주거관을 고찰하려 한다. 이 장에서는 전통 주거문화의 근저를 이루는 가치관을 파악하는 것과 함께 그것의 현재적 교훈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겠다.

2-1 전통 주거문화의 배경

2-1-1 유교사상(성리학)

성리학은 중국 송(宋)시대에 주자(朱子)가 정립한 학문이다. 그것은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이자 생활문화로 자리잡았다. 성리학이 추구한 것은 한마디로 '질서있는 사회'이었다. 따라서 성리학을 사회적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위계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여러 사회제도들이 정비되게 된다. 이들 제도는 주택에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며 주거문화에 직접,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 신분제도

주택은 전통사회에서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는 물리적 요소의 하나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국의 전통주택을 크게 양반의 주택인 반가(班家)와 서민의 주택인 민가(民家)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우리 주택이 신분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양반, 중인, 상민(서민), 노비 등 사회적 신분의 차이는 그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규모와 공간구성, 그리고 건축적 처리의 차이로 드러난다. 또한, 조선시대의 반가에는 하나의 주거공간 내에 서로 다른 신분의 거주자가 서로 다른 채에 거주한다. 이 때 '딸린 식구'들은 행랑채에 거주하는데, 행랑채는 모든 면에서 안채나 사랑채보다 위계가 낮다.

이런 신분제도가 주택에 대한 법적인 규제를 낳았다. 법적 규제를 통해 제도적으로 신분에 따라 주택의 제반조건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이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법적 제한의 내용은 가대(家垈) 곧 부지의 면적에 대한 제한, 가사(家舍) 곧 간수(間數)나 주고(柱高) 등 주택의 규모에 대한 제한, 그리고 단청이나 화공(花공 , 또는 공포(공包)), 숙석(熟石; 다듬은 돌) 등 장식에 대한 제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주택에 대한 규제

먼저 가대(家垈)의 제한을 보면, 대군, 공주의 30부(負)(약 1,170평)에서부터 일반 백성인 서인(庶人)의 2부(약 78평)에 이르기까지 신분별로 대지의 규모를 제한하였다. 다음으로 가사(家舍)의 제한에 있어서는 대군의 60간에서부터 백성들의 10간에 이르는 상한선이 정해졌다. 그리고 살림집에서는 주줏돌을 포함하여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화공(花 )이라는 공포를 구성하지 못하도록 하고, 진채단청(眞彩丹靑)을 못하게 하였으며, 석회 바르는 일도 제한하였다.(신영훈, 한국의 살림집, 열화당, 1983, pp.202~210)

공포(공包)와 화공(花공)

공포 또는 포작(包作)이란 목가구식(木架構式) 건물에서 주두(柱頭; 기둥의 머리)를 연결하는 수평부재인 '창방'과 처마를 받치는 수평부재인 '처마도리' 또는 '외목도리' 사이에 짜맞추어진 요소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는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하는 구조적인 의미와 함께 장식적인 의미를 갖는 부위로서 한국의 전통건축을 양식적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화공(花 )은 일종의 공포로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의 앞머리를 꽃모양으로 치장한 모습을 말한다.

이같이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주택의 대지에서 장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제한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법적 제한은 주택을 통해 신분의 위계를 나타내고 유지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도성 안의 제한된 택지의 공급을 조절하고, 한옥의 주된 재료인 소나무와 같이 당시에 부족한 건축재료의 사용을 통제하여 수급을 조절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오면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으로부터 법적 제한이 잘 지켜지지 않게 된다.

2) 가족제도

전통사회의 가족제도는 주로 확대 가족이었다.¹⁾ 이러한 확대가족 또는 대가족제에서는 선조숭배(先祖崇拜)가 중요한 덕목이다. 따라서 주택에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나 재실(齋室) 등 가묘(家廟)가 도입된다. 가묘제(家廟制)는 고려 말 정몽주가 향교를 신설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가묘를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인 이상 계급은 사당을 정침(正寢)의 동쪽에 별동으로 두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와 함께 확대가족 또는 대가족 아래서는 각 세대(世代)가 사용하는 공간을 잘 조절하여 하나의 주택으로 통합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따라서 주택의 공간구성에서 세대를 적절히 분리하고 한편으로는 원활히 통합하려는 의도가 나타난다.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은 각각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공간으로서, 대청에 의해 적절히 분절되어 배열된다. 사랑채에서는 아버지가 사용하는 큰 사랑방과 아들이 사용하는 작은 사랑방이 나란히 자리잡는다.

이같은 부계 직계가족의 전통은 마을을 구성하는 데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씨족(氏族)마을 또는 동족(同族)마을이라는 독특한 한국의 마을유형은 바로 이러한 종법(宗法)제도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자리잡은 씨족마을은 우리 나라 전형적인 마을유형으로 자리잡아 근대화시기까지 지속되게 된다. 1930년의 임시 국세조사를 보면 한국 마을의 반 이상이 씨족마을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씨족마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주자가례(朱子家禮)

주자의 가례는 선비들이 지켜야 할 예제를 규정한 책이다. 주자는 중국 고대의 예제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윤리체계를 설정했다. 그 중 특히 중시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제례(祭禮)이다. 주자가례는 일찍부터 조산의 선비사회에 알려졌지만 조선초기에는 그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들면서 가례의 내용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의 전통 주거문화는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김동욱, 한국건축의 역사, 기문당, 1997, pp.235~236)

2-1-2 풍수지리

풍수지리는 동양적 사유의 근간인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을 바탕으로 형성된 환경 해석방법이자 환경계획이론이다. 그것의 핵심적 구성요소는 산(山), 수(水), 방위(方位)이다. 풍수지리는 적용대상에 따라 죽은 사람의 집, 곧 묘지를 다루는 음택론(陰宅論)과 산 사람의 집을 다루는 양택론(陽宅論)으로 나뉜다. 흔히 풍수사상은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인 도선(道詵; 827~898)이 중국으로부터 도입하였다고 하나, 이미 그 이전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²⁾이렇게 풍수지리가 한국에 도입된 후, 그것은 한국의 도시와 마을구성에서부터, 택지를 선정하고, 실을 배치하고, 대문의 위치를 정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거주지와 주택을 조성하는 행위의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

음양과 오행으로 자연의 섭리를 설명하는 동양의 이론이다. 음양은 태극(太極)에서 분파된 상대적 개념이고, 오행은 금목수화토(金木水火土) 다섯 가지의 물체로서 자연의 현상과 이치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개념이다. 음양오행론은 '주역(周易)'의 중심적 논제이며, 철학의 범위를 넘어 의학, 수학, 풍수지리,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의 이론을 구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풍수지리의 이론과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 그림 2.1에 나타난 음양오행의 기본개념을 숙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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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음양오행도

(자료; 한규성, 역학원리강화, 예문지, 1997, p.135 )

한 마디로 풍수를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환경조건을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상적인 땅을 풍수지리에서는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명당의 도식적 조건과 관련되는 용어는 그림 2.2와 같다. 풍수지리에서 보는 이상적 대지는 현재의 환경심리학에서 바람직한 거주 장소로 제시하는 것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림 2.2에서 보듯이 명당은 전후(前後)의 축(軸)을 가지고 산으로 잘 둘러싸여 아늑한 영역이 만들어지는 장소이다. 이러한 명당은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생각된다. 영어에서 '집에 있다(at home)'는 말이 동시에 편안함을 의미하듯이, 사실 집과 편안한 느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주거에서 안락함을 찾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 심리이다. 명당은 자연요소들에 의해 편안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성을 가진 곳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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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산(祖山), 종산(宗山) : 혈 뒤의 멀리 떨어진 산 2. 주산(主山) : 혈 뒤의 높은 산 3. 입수(入首) : 주산으로부터 혈로 들어가는 지점 4. 두뇌(頭腦) : 입수와 혈과의 접합지점 5. 미사(眉砂) 6. 혈(穴) : 지맥(地脈) 중 기(氣)와 정(精)이 가장 잘 모인 곳 7. 명당(明堂) : 혈의 바로 앞, 청룡, 백호가 감싸고 있는 곳 8. 좌청룡(左靑龍) 9. 우백호(右白虎) 10. 내좌청룡(內左靑龍) 11. 내우백호(內右白虎) 12. 안산(案山) : 명당 앞에 가까이 있는 낮은 산 13. 조산(朝山) : 안산을 넘어 멀리 있으면서 높고 큰 산 14. 수(水) 15. 내수구(內水口) 16. 외수구(外水口)

<그림 2.2> 풍수지리의 이상적 국면(局面)

풍수지리의 한 특징은 그것이 주거공간과 주변환경의 관계를 중시하며 주변환경에 대해 상징적인 해석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풍수를 따른 전통사회의 거주자들은 주거지와 그 주변 경관에 대한 풍수적 해석을 공유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어떤 마을들의 형상은 배에 비유되는데 이런 마을들에서는 마을 내에 우물을 파는 것이 금지된다. 결국 이렇게 마을의 경관에 대한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마을의 공간질서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풍수와 달리 우리 나라의 풍수지리에서는 비보(裨補) 풍수의 개념이 발달하였다.³⁾ 비보란 부족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보완한다는 뜻이다. 비보풍수에는, 이상적인 장소란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풍수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인공적으로 보완함으로써 주어진 환경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여 활용하려는 적극적인 개념이 담겨 있다. 예로서, 안산(案山)이 취약한 마을에서는 동수(洞藪)라고 불리는 수목군을 마을 전면에 조성해 놓음으로써 풍수적 국면의 약점을 보완한다. 우리는 비보풍수에서 풍수지리의 환경계획적 측면을 보게 된다.

풍수지리는 오늘날 주술적으로 이용됨으로써 주거환경에 대한 가치관을 혼돈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했지만, 풍수지리의 본질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적 자연관이 응축되어 있으며, 환경심리학적 고려를 바탕으로 환경계획의 과학적 측면들이 잘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풍수지리는 현재의 환경계획 원리로서 재조명될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2-2 임원경제지를 통해서 본 전통 주거관⁴⁾

임원경제지(林園經濟志)

임원십육지(林園十六志)라고도 하며 실학파 학자인 서유구(1764~1845)가 쓴 책이다. 이 책의 전반적인 성격은 농업을 위주로 한 산업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데 그 중 상택지(相宅志) 제1 권은 우리의 전통 주거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상택지라는 표제의 뜻은, 상(相)은 살펴본다는 뜻이고 택(宅)은 집을 뜻하므로 '집을 살펴 고른다'는 의미이다. 이 책에서 최상의 집터는 '주위 자연환경이 집을 마주보고 감싸안고 있으며, 기상이 밝고 깊으며, 형세가 넓고 부드러우며, 토양이 비옥하고 샘물은 달고 바위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설명한다.

2-2-1 임원경제지 '상택지(相宅志)' 연구의 의의⁵⁾

1) 임원경제지 '상택지'의 내용과 구성

서유구의 상택지는 18세기 전후의 주거관을 종합하여 체계있게 정리한 책으로, 2권 9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 권은 집터를 잡는 것에 관한 점기(占基)와 주택건축과 주위 환경 조성에 관한 영치(營治)로 구성된다. 그리고 제2 권은 우리 나라 팔도의 좋은 주거지를 설명한 팔역명기(八域名基)이다.

상택지 제 1 권의 내용에는 여러 사람들의 저술이 인용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터잡기(占基)의 내용은 이중환(李重煥; 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 八域可居誌라고도 함)를, 집짓기(營治)는 유중림(柳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1766)를 주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서유구 자신이 인용된 책들에서 미비한 체계를 세우고 내용을 많이 보완하였으며 새로운 것을 추가한 것도 있다.

2) 상택지 연구의 의의

이같이 여러 저술들을 종합하고 발전적으로 구성한 결과인 상택지는 우리의 전통 주거관을 살펴보는 데 가장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은 18세기 경의 우리 주거관에 대해 비합리적인 것을 배제하고 합리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 피해야될 사항을 다룬 피기(避忌)에서 조차도 속신적 내용을 나열하기보다는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설명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오늘날 주거의 문제에서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사회생활에 관한 내용을 다룬 '이인(里仁)'에서 인간의 품성이 자연환경 또는 사회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현대적 주거론에서는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측면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인간성의 문제를 주거환경과 연계하여 인간성 회복의 한 방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양택론은 대개 중국의 책으로서 우리 나라에 적용하는 데는 문제점이 많았다. 이에 대해 우리의 현실에 맞는 주거론의 체계를 정립하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요구였고 이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상택지라고 여겨진다. 근래에 우리는 서구의 주거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주거에 대한 관념들을 비과학적으로 매도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상택지는 당시와 유사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우리에게 우리 나름의 주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일깨우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임원경제지 상택지 중에서 전통 주거관과 직접 설명해주는 부분들을 오늘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2-2 임원경제 상택지의 주거관

1) 터잡기(占基)

① 총론(總論)

복거란 적당한 거주지를 선정한다는 의미인데, 총론에서는 복거사요(卜居四要)라 하여 주거지를 선택하는 데는 네 가지 요건을 고려해야 함을 지적한다. 그것은 땅의 흐름(地理), 경제(生理), 사회생활(人心), 그리고 자연경관(山水)이다. 이는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주거지의 입지조건에 해당한다.

② 땅의 흐름(地理)

주택의 입지조건으로 배산임호(背山臨湖)를 든다. 삶의 터전은 수로와 육로가 잘 통하는 곳에 위치하여야 하므로 산을 등지고 호수를 바라보는 장소를 높이 치는 것이다. 이렇게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지형은 배수와 조망에도 유리하므로 오늘의 관점에서도 주거지로서 매우 합리적인 장소이다. 지형은 트이고 넓으면서도 긴밀하게 에워싸야 좋다고 한다. 농업을 경영할 경작지를 갖되, 주거지로서 뚜렷한 영역이 형성될 수 있는 지형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③ 물과 토지(水土)

집터를 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물과 토지를 살펴야 함을 지적한다. 물은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자원일 뿐 아니라 농업의 요건이므로 물을 얻는 것은 우리의 마을과 주택이 자리잡는 데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서는 물과 토지의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기준은 물론 전국의 이름난 샘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④ 경제(生理)

주거지를 선택함에는 농업과 상업에 편리한 곳을 택하여야 함을 말한다. 유통을 위해서 교통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전통적 주거관에서 실용적 측면이 결코 경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⑤ 사회생활(里仁)

집터를 선택할 때는 풍속과 인심을 살펴야 함을 지적한다. 주거의 사회적 측면이 강조된 부분이다.

⑥ 자연경관(勝槪)

높은 산이나 급히 흐르는 물가에 주거지를 정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잠시 머무르는 사찰이나 정자와 같은 건물과 달리 평생 거주하는 주택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있는 입지에 위치하여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경관이 좋은 곳이라고 해도 경제적 조건이 불리하면 주거지로서는 부적합함을 주장한다. 경치가 좋은 곳은 주거지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도 때로 찾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경제활동은 더욱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⑦ 피해야 할 곳(避忌)

다양한 책들을 인용하여 주거지로서 피해야 할 곳들을 정리해 놓았다. 예로서, 이전의 종교건물 자리, 대장간 자리, 군의 주둔지, 전쟁터, 초목이 나지 않는 곳, 물이 흐르는 데를 똑바로 마주한 곳, 산등성이와 만나는 곳, 큰 성문 입구, 감옥 문을 마주보는 곳, 시냇물이 모여드는 입구 등은 주거지로서 부적합하다고 한다. 물리적 측면에 관한 내용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합리적이다.

2) 집짓기(營治)

① 터닦기(開荒)

대지를 조성할 때 나무를 베어내는 법, 집터를 닦는 법, 지형을 변형시킬 때의 유의사항 등을 상세히 기술한다. 지형 등 자연조건을 중요시하여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되 부정적인 요소들은 제거하고 보완하도록 충고한다. 주택을 건축할 때, 주어진 조건에 마냥 순응하거나 막연하게 이상적인 대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 조건의 부족한 점을 개선하여 활용하는 적극적인 관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② 조경(種植)

조경의 중요성과 금기사항들을 제시한다. 내용 중에는 '안마당에 나무를 심으면 한 달 안에 재물 천만금을 날리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곤(困)자를 연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는, 집은 건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둘러싸는 환경 속에서 기능하고 의미를 갖는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③ 주택의 구성(建置)

주택의 실을 구성하는 방법과 각 실의 요건 등을 제시한다. 방은 남향을 하고 불필요한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짜임새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 밖에도, 문과 길, 담장을 설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설명한다. 주택이 주변과 어떻게 관련되어야 하는지 구조적 관점으로 제시한 것이다. 주택을 독립적인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주변과 조화있게 연계시켜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④ 토목공사(井池溝渠; 우물, 연못, 도랑)

우물과 연못, 도랑을 조성하는 방법들과 금기할 사항들을 말한다.

1) 흔히 한국의 전통적 가족제도를 대가족제도라고 부르지만,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대가족이란 장남은 물론 차남들의 가족 모두가 같은 호구를 이루는 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할아버지-맏아들-맏손자의 직계 3대만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한국의 가정들은 대가족이 아닌 '직계가족' 혹은 '확대가족'에 속한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대가족제도'를 운영했던 중국과는 달리, 한국은 직계 확대가족제를 선호해왔다. 이는 대토지 소유가 용이치 않았던 한국 가정의 경제조건에 적절한 가족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김봉렬 등, 전통주거의 계획개념 및 설계요소에 관한 연구 II : 사례연구,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 한국 예술 종합학교, 1997, p.24)

2)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p. 46

3) 최창조는 비보풍수를 한국 풍수의 독자적 특성으로 본다.

4) '김성우, 안대회, 임원경제지 상택지 권제 1(林園經濟志相宅志卷第一), 꾸밈 79, 81, 82, 83, 85호'의 번역을 참조함.

5) 김홍식, 민족건축론, 한길사, 1987, pp.172~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