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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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외과

 

기억의 지속과 유형의 진화

 

설계 : 조정구(구가도시건축)

시공 : 태령종합건설주식회사

위치 :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건축연도 : 2012

규모: 지상1층(한옥) + 지상2층(일식건물)

구조 : 한식목구조, 목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자료: 구가도시건축

일전에, 오래 전부터 터를 잡아둔 전원에 집을 지은 분을 만났다. 그 분 말씀이 집을 다 짓고서 옛 사진을 보니 그 자리에 있던 집이 그리워지더란다. 그때 나는 새 집이지만 그 자리에 있던 집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집 이야기를 했다. 바로 건축가 조정구의 대구 삼덕동 L외과이다. 

삼덕동이라는 역사도시 대구의 오래된 마을 초입에서 처음 본 그 새 집은 낯설지 않았다. 이전에 그 자리에 있던 집을 알지 못하는 내게도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서로 다른 유형의 두 건물은 익숙했다. 이것이 기억을 나르는 유형의 힘이다. 그곳을 한 번 둘러보고서 유형과 함께 건물의 배치와 향, 건물과 마당의 윤곽선, 그리고 분위기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자생적 건축 질서가 유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곳이 큰 병의 환자를 상담하고 진찰하고 수술하는 마음 무거운 곳임에도 낯설지 않은 그 집에서 마주친 이들은 모두 편안해 보였다. 건축주는 환자를 따뜻하게 상담하고 대함으로써 몸의 병과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유방암 전문 의사이다. 그가 환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담아낼 수 있는 건축유형으로 선택한 것이 한옥이었다.

동아시아의 문명 속에서 틀을 갖춘 한국의 역사도시는 주요 가로라는 선()과 그 이면의 면()이라는 이원적인 공간구조를 갖게 되었다. 도시의 선에는 어느 도시나 별 차이 없이 국제주의 양식의 기능적인 대형 건물들이 들어서지만 도시 특유의 주거유형이 골목으로 엮여있는 도시의 면에는 도시마다의 특성이 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인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은 도시의 면, 곧 도시마을이다. L외과가 들어선 삼덕동은 한옥과 일식건물들로 구성된 차분한 도시마을이다. 건축주는 한옥이라는 유형으로 휴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도시의 선()에서 도시마을로 병원을 옮겼다.

L외과가 자리한 도시마을은 본래 도시한옥으로 이루어진 동질적인 주거지였을 것이나 일제강점기에 일식 건물이 들어서고 근래에는 양옥들이 그것들을 대체해서 다양한 유형의 건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서로 다른 단독주택 유형들은 이 주거지가 거쳐 온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마을길을 걸으며 한옥, 일식주택, 양옥으로 이어지는 유형의 변화를 통해 도시의 시간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도시마을의 시간성을 잘 이해한 건축가 조정구는 아마 우리 도시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했다. 서로 다른 시기의 유형들로 존재했던 건물들을 재해석해 동시에 실현한 것이다. 이로써 건축유형은 특정 시대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건축주의 의도와 건축가의 해석을 만나게 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많은 도시마을들이 그렇듯이 삼덕동 또한 최근 단독주택들을 밀어낸 원룸 건물들이 차분한 주거지를 위협하고 있다. 그간 도시마을에서 진행되어 온 유형의 다양화와는 다른, 유형의 이질화와 충돌 현상이다. 이런 위험한 시절에 L외과는 유형을 재해석하여 시대의 속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삼덕동을 비롯한 도시마을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한옥은 더 이상 과거의 유형이 아니다.’

L외과의 부지에는 한정식집으로 쓰이던 한옥과 일식주택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L외과에서 이 두 유형의 건물들은 윤곽을 유지한 채 진화한 모습으로 과거의 형상과 기억을 간직한 사이마당을 마주하고 있다. 두 유형의 진화는 건물과 도시 차원 모두에서 일어났는데 그런 두 가지 성격의 진화를 촉발한 것이 바로 사이마당이다.

마당의 생명은 스케일과 경계의 정의에 있지 않을까? 먼저 사이마당은 스케일이 적절하다. 너비가 의원으로 사용하는 한옥의 안마당과 거의 비슷해서 사이마당 치고는 넓은 편이지만, 양쪽에 마주한 두 건물이 켜켜이 깊은 공간을 갖추고 있어 이보다 좁았으면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이마당의 경계는 한옥의 툇마루와 일식주택의 엔가와(緣側)라는 요소로 정의되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이 요소들은 모두 각각의 몸체에 덧댄 부분으로, 유형의 진화가 마당을 향한 공간 켜의 부가라는 방식으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런 공간 켜의 부가는 내부에서 공간의 확장으로 읽힌다.

의원으로 쓰이는 한옥은 공간의 두께와 가구(架構)형식이 각기 다른 세 부분이 자를 이루고 있다. 문간채는 3, 촬영실이 있는 가운데 부분은 5, 대기실이 있는 몸채는 무고주 4량에 후퇴공간을 부가한 가장 깊은 공간이다. 이는 가운데 부분에 대청을 둔 자형 전통한옥과 다른, 삼덕동을 구성했던 자형 한옥에 일자형의 문간채를 이은 형태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이 모두 새로운 자형 한옥의 평면은 칸의 일정한 반복으로 구성되는 과거 한옥과 달리 의원이라는 새롭고 세밀한 프로그램을 담아낼 만큼 자유롭다.

개방적인 한옥으로 어떻게 폐쇄적이어야 하는 의료공간을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은 고밀도의 도시 주거지에서 어떻게 개방적인 한옥을 짓고 내밀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유사하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면 한옥의 도시성에 대한 의심이 해소되고 한옥은 도시로 한 걸음 진화해나갈 수 있으리라. L외과에서 이 문제는 개방적인 켜를 폐쇄적인 몸체 둘레에 부가함으로써 해결했다. 그 개방적인 켜는 도시 가로에서 살짝 드러나 마을의 풍경을 이루는 마당에 이어진다. 그래서 투명성을 유지한 한옥은 도시로 열려져 흐른다.

한옥의 깊은 마당은 두 켜로 구성해 안쪽 부분은 내부화했다. 목조가 아니라 경량의 강구조로 만든 밝은 아트리움이다. 바깥 부분은 직접 대응하는 진료실에서 내다보는 창이 하나 있을 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실내공간이 없어 활용도는 높지 않을 것 같다. 낙엽수로 조경을 하여 여름에는 아트리움에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에는 따스한 햇볕을 통과시키면 어떨까 한다. 그 수목들이 마을길의 풍경을 더 정취있게 만들 것이다.

철근콘크리트조와 경골목구조의 결합으로 구축한 2층 일식건물인 별관은 2층 부분이 단순한 형태로 전면 가로와 다소 어긋나게 정남향을 취한 반면, 1층은 엔가와를 매개로 사이마당과 뒤뜰과 만난다. 1층은 꺾이며 성장하는 일식 주택의 패턴을 따름으로써 부정형의 대지에 대응하고 있다. 한옥이 기둥을 일정한 격자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평면을 얻었다면 별관은 기둥을 최소화 하여 일식주택 특유의 통합된 실내공간을 만들었다. 이를 위해 2층의 하중을 지지하는 모서리 기둥은 철골 기둥을 목재로 마감했다.

라궁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가 조정구는 한옥을 탐구하고 실험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는 한옥이라는 물리적 유형의 지속을 믿고 그것이 음식점, 호텔, 도서관 등 다양한 용도를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외과 의원이었다. 그가 한옥의 용도를 확장할 때마다 한옥은 건물 차원에서 조금씩 진화해왔다. 그의 천착이 지향하는 목표는 한옥에 현대생활을 담아냄으로써 현대인과 한옥을 맺어주고 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삼덕동 L외과에서 주목할 점은, 그의 노력으로 한옥이 도시와의 관계 설정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화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최근 한옥이 부상하면서 가장 의심받는 지점은 도시성의 문제다. 삼덕동 L외과는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과 건물, 그리고 건물과 도시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그런 의심을 떨쳤다. 마지막으로, 도시의 기억을 지속하며 내밀한 공간을 개방적인 한옥에 담아낸 뜻 깊은 한옥의 진화 뒤에는 한옥이라는 유형에 대한 신뢰로 만난 건축가와 건축주가 함께 있음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