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동아시아 도시의 이원적 공간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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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필원 / 한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 이 글은 1999년 10월 1일 서울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두 세기의 갈림길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는다 (瑞南 李洋球 會長 10周忌 追慕 국제학술대회)' 에서 발표된 '非 패러다임의 동아시아 도시ㆍ건축(발표; 김진애)'에 대한 논평문이다.

오늘날 상하이의 모습

1. 동아시아 도시ㆍ건축 연구의 필요성

무릇 모든 대상이 그렇듯, 도시와 건축을 포함한 환경도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파악된다. 서구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동아시아의 도시와 건축을 볼 것이다. 그들은 주로 문화적 호기심으로부터 또는 시장으로서 접근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시아인의 시각도, 특히 교류가 상당기간 동안 단절되었던 중국에 대해서는, 서구인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내부자의 관점이 외부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 바로 동아시아인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도시ㆍ건축을 보고 연구하여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는 현재 동아시아의 도시ㆍ건축이 처한 현실과 현상을 비판할 기준을 마련하고 나아가서 그것이 내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서를 찾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서구 중심적으로 형성되어온 도시ㆍ건축의 이론과 실천방법들을 비판하고 좀더 보편적인(global) 대안을 찾기 위해서이다.

전자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본다. 동아시아 도시ㆍ건축의 현재 모습은 발표자의 지적대로 '혼돈 또는 높은 entropy'로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고 외부적 시각에서는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그러한 모습에는, 특히 거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용인하기 힘든 부정적인 면이 많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의 현대 도시환경이 거주자에게 일상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경시하여서는 안된다. 동아시아인들이 자신들의 도시환경과 반대의 상황에 있는 서유럽의 도시들에 매료되는 것은 문화적 선호나 호기심 또는 '선진 모델'을 막연히 꿈꾸는 것에서가 아니라 현실적 문제의 심각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발표자도 강조했듯이, 이른바 서구 모델이 곧바로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들은 대체로 20세기 후반, 도시의 근대화ㆍ서구화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문제의 진단부터 자신의 잣대로 하여야 할 것이며 앞으로 동아시아 도시ㆍ건축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행히 최근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 에도(江戶)시대의 도꾜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역사도시를 연구하는 붐이 이는 것도, 일본 특유의 팽창주의적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후자의 문제를 살펴본다. 이제까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도시ㆍ건축이론들을 보면 한결같이 서구, 특히 서유럽의 몇몇 중세도시들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 것이다. 예를 들어 K. Lynch는 서유럽의 도시 모델로 미국 도시의 문제를 비판하고 해법을 찾으려 했다. A. Rossi의 이론도 서유럽의 국한성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이론은 그러한 태생적 국한성 때문에 국제화시대에 유력한 이론으로 살아남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통용될 국제적 이론은 동아시아의 도시ㆍ건축에 대한 고찰의 결과를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서구의 도시ㆍ건축이론들이 그들의 역사도시에서 현대 건축활동의 근거를 가져왔음을 생각할 때 동아시아의 경우는 문제의 해법을 어떻게 모색해야 할 것인가? 동아시아의 도시ㆍ건축 문제는 서구에 국한된 기존 이론 또는 유행적인 사례연구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도시구조 현실에 토대를 둔 이론 또는 방법에 의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擬似 패러다임'을 경계하는 발표자의 논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되나, '경계'에서 나아가 자기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방향'을 찾아야 할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2. 이원적 도시공간 구조

발표자는 현재 곧 20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도시ㆍ건축 현상을 '非 패러다임'으로 규정했는데, 좀더 공간구조적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적 구조란 한 도시에 세계적(cosmopolitan) 측면과 지역적(local) 측면이 공존함을 말하는데 특히 이러한 이원성이 가로()를 중심으로 형성 유지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표 논고에서도 '극과 극의 스케일의 병존' 등 이원성이 지적되었는데, 여기서는 그와 관련되나 다소 다른 각도에서 길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공간구조의 이원성을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20세기의 급속한 도시화과정이 동아시아 역사도시들의 면모를 와해하고 왜곡시키면서도 한편으로 하나의 방향성을 태동시키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발표 논고의 '7'에는 '영역이 길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동아시아의 역사도시에서 궁궐 등 권위건축의 영역에서는 그것이 타당한 이야기로 생각되나 일반적인 도시공간에서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필자는 오히려 동아시아의 도시구조에서 가장 주목하여야 할 것은 가로체계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도시와 달리, 동아시아 도시의 가로는 도시생활을 담는 장소이며 도시적 공간의 대부분을 의미한다. 그것은 도시 영역의 경계로서가 아니라 통합하는 요소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도시 자체를 의미한다. (길을 지칭하는 한국과 중국의 街, 일본의 町(마찌)는 바로 도시를 의미한다.)

동아시아 도시의 가로는 이원적이다. 그것은 대로와 이면 도로 - 한국에서는 골목길, 중국에서는 후통(胡同), 일본에서는 로지(路地) 등으로 불린다. - 로 구분된다. 전자는 도시의 주요한 線이며, 후자는 조직되어 도시의 面을 형성한다. 이 선과 면은 인접하면서도 서로 일상적 관련을 갖지 않고 존재한다. 현재 전자는 대형 업무 및 상업 건물들로 규정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아시아 도시의 기본 틀이 미국적인 또는 무국적의 대형구조물로 채워지고 있음을 본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도시의 필연적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아직 지역의 전통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서울, 일본의 도꾜, 교또, 중국의 北京, 上海...... 어느 도시에서도 대로의 뒤로 한 켜를 들어가면 여전히 지역성이 강한 도시의 면이 펼쳐진다. 동아시아의 도시ㆍ건축이 근대시기에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크게 변형된 것은 사실이나, 이렇게 현상을 넘어서 좀더 공간구조적으로 들어가면 아직 역사적 맥락(context)이 힘겹게나마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도시의 독자적 가능성을 내포한 부분, 또한 동아시아의 도시들 사이를 구별하여주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도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심적 요소는 '도시주거'라고 할 수 있다. 도시주거의 유형은 도시구조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도시주거는 단위주거의 개별적 중정 - 한국의 안마당, 중국의 院子, 일본의 庭(니와) - 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기도 하나, 구체적으로는 각 도시의 특성을 내포하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발표 논고의 '8번'에서 동아시아 도시ㆍ건축 전통의 차이가 언급되었는데,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도시주거의 유형이다. 따라서 그것은 동아시아 도시의 정체성뿐 아니라 동아시아 내에서 도시들 사이의 개별성을 발견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발표 논고의 마지막 부분에는 동아시아 도시ㆍ건축의 과제가 세 가지로 제시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필자는 '동아시아 도시구조의 이원성'을 20세기 후반이 태동한 새로운 전통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길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구조의 이원성을 앞으로도 지속, 강화될 하나의 모델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는 현재 동아시아인들이 바람직한 모델로 생각하는 유럽 도시의 공간구조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대체로 유럽 도시들은 대로와 이면도로가 집합주거 블록의 중정을 매개로 연결되므로 그러한 극적인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3. 반성과 모색

이러한 이원성으로 20세기 말 동아시아 대도시들의 지향을 비판할 수 있다. 그간 도시화 과정에서 한국의 도시들은 서구의 모델을 추종하는 일원적 개발을 추구했다. 규모와 유형에 있어서 새로운 건축물을 주요 가로에 線으로 도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의 面으로 확산시킴으로써 도시 전체의 정체성이 상실될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중국의 도시들에서는 모든 건축물의 형태에 역사적 전통을 유지하려는 일원적 방향을 추구한다. 전통요소를 모든 건축 유형에 무리하게 도입함으로써 역사도시의 주요가로를 유치한 복고적 건축의 전시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렇게, 그것이 어떠한 모델이든, 도시 전체를 하나의 모델로 구성하려는 것은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시도이다. 그것은 오늘의 동아시아 도시에 혼란을 가중시킨 근본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발표자의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은 이런 측면을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발표자가 제기한 '리얼리티에 바탕을 둔 방향성 모색'은 간과하기 쉬운 문제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우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고밀도 등의 어쩔 수 없는 조건들을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발표자의 '긍정, 이해, 공감'이라는 표현의 뉘앙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현실에 바탕을 두는 것과 현실의 추세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아시아 도시ㆍ건축의 모델은 여전히 모색되고 제시될 필요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기의 전환기인 현재야말로 동아시아 도시들이 그간 힘겹게 지탱해온 '아름다운 도시ㆍ건축의 전통'을 상실할 임계 시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델 또는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에 앞에서 논한 線과 面의 이원적 구조가 존중되어야 하고 그에 적합한 방법론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동아시아의 도시는 '세계(특히 서양)로 통하는 곳'으로서의 20세기적 모습에서 '세계를 수용하는' 21세기의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