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건축을 답사하려는 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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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원 / 000122

 

답사는 건축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이다.어떻게 보면 여행이고 어떻게 보면 공부이니 어찌 아니 즐겁겠는가? 사실 나도 답사를 핑계로 무수한 나날을 밖으로 돌고 있다. 시쳇말로 잘 나가는 내 친구들도 나를 부러워하는 구석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내가 수시로 답사를 다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간혹 무슨 혐의를 찾으려는 듯 묻기도 한다. "혹시 답사를 구실로 놀러가는 것 아냐?" 그 때 나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이렇게 힘들게 돌아다녀야 하다니, 건축은 정말 힘든 공부야!" 그 표정과 말 모두 이미 나에겐 익숙하다. 이제 20여년에 이르는 나의 답사역정은 국토의 대부분은 물론 해외의 13개 나라들에 미치건만, 지금도 지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 여기가 있구나!'한다. 아직 먼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건축답사는 흔히 생각하듯 건물을 보러가는 것이 아 니다. 특히 전통건축을 답사할 때는 밖에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건물 또는 장소 안으로 들어가서 밖을 가까이 또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전통건축에서 중심은 바로 거주자이다. 남들 보기좋으라도 그리 힘들여 지었겠는가? 우리는 답사를 하면서 짧은 시간이나마 거주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건물과 그것이 놓인 환경을 총체적으로 경험하여야 한다. 전통건축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주변과 유기적이고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실존의 장소이고 자연과 인위가 어우러진 환경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주변의 산에라도 올라 광역적인 환경을 예리하게 살펴야한다. 우리 일상의 부족한 운동량을 생각할 때, 이것은 몸에도 좋은 일이다. 아쉽게도 문화재 관리행정의 저급한 수준 때문에 문이 잠겨서 건물이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전통건축이 많다. 때문에 미리 관리자를 알아보고 연락을 해두어서 답사에서 건축을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 때는 관리자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그분들의 보답없는 노고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다시 오게 될 것을 염두에 둔 영악한 처신이다.

전통건축을 답사할 때 주로 동원되는 방법이 사진촬영이다. 나도 그랬거니와 대개 초보 답사자의 경우 그냥 찍어대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는 말한다. "오늘 네 통이나 찍었네!" '묻지마 촬영!'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사진은 왜 찍는 것인가? 그것은 현장에서 돌아와 사실을 확인하고 공부하는 자료로 쓰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찍을 것인지 잘 생각해보고 셔터를 누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부터, 먼저 전체 영역을 찬찬히 살펴본 후 필요한 부분을 필요한 시각에서 촬영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래도 돌아와서 보면 꼭 필요한 사진이 누락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촬영할 장소와 내용을 미리 메모한 후 촬영을 하는 것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답사 대상지 및 건축에 대해 사전에 자료를 수집하고 학습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가 없이 떠나는 답사란, 나를 의심하는 친구들 말대로, '놀러가는' 것에 다름없다. 그렇게 놀러간 사람들은 가본 곳은 많으나 본 것은 거의 없다. ", 나 안동 가봤어......"

또 하나의 좋은 답사방법은 스케치이다. 사실 스케치만큼 확실한 현장답사 방법이 없을 듯하다. 사진이야 별 생각이 없이도 찍을 수 있지만 스케치는 그 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없이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스케치를 하는 방법이다. 풍경화를 그리듯 의미없는 내용을 복잡하게 스케치할 바엔 사진을 찍는 편이 낫다. 그리고 뚜렷이 본 것이 없다면 그냥 종이라도 아끼길 권하고 싶다. 건축공부는 만화나 그림 공부가 아니므로. 자신이 인식한 건축적인 내용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답사 스케치의 요점이다. 처음에는 뜻대로 표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도 한 컷을 그릴 때 몇 번씩 찢어낸다. 처음에는 그림이 예쁘지 않아 찢었는데 근래에는 좀더 간결히 표현해보려고. 그러나 누구든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자기만의 스케치 방법이 터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스케치를 하려면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황급히 돌아보는 답사에서는 스케치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여유있게 생각하며 스케치하는 답사야말로 진정한 건축공부 방법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좀더 전문적인 답사에서는 실측을 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다. 실측은 한 마디로 설계를 하는 반대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설계를 하면서 그것이 구현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는데, 실측을 통해 그러한 예측능력을 키울 수 있다. 실측을 하면 이른바 스케일감이 부쩍 는다. 어찌 보면 건축은 치수와의 씨름같다. 아무튼 어떠한 대상을 정확히 기록해두기 위해서는 실측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차에는 항상 나침반과 길고 짧은 줄자가 준비되어 있다. 여차하면 들이대는 것이다. 그런데 더 좋은 실측방법은 인체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20cm의 손바닥과 90cm의 보폭을 가지고 있다. 어떨 때는 미심쩍어 다시 자를 대어보기도 하지만 놀랄 만큼 정확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미 성장기의 소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참고가 될까 하여 필자의 스케치 두 장을 소개한다. '스케치 1'은 평범한 우리 나라의 전통마을인 경북 김천시 근교의 원터마을에 있는 방초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에 올라 그린 것이다. 인심좋은 이 마을에서는 빨리 내려오라는 사람도 없으므로 편안하게 그린 스케치이다. 이 스케치는 마을의 입구에 서있는 정자라는 건물이 마을영역과 그 주변환경을 맺어주고 있음을 느낀 결과이다. 정자 앞에는 연못과 수목이 있어 근경을 이루고 그 너머로 존재하는 산세의 원경이 수목들 사이로 낮게 비추어진다. 정자의 난간과 기둥은 경치를 담아두는 픽춰 프레임(picture frame) 역할을 해준다. 이 스케치에서 나는, 한국의 전통마을이란 영역을 명확히 규정하되 주변과 광역적인 관계를 맺고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이러한 특성은 같은 문화권인 중국의 마을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 마을만의 중요한 특성임을 알게 되었다. '스케치 2'는 지난 해(1999) 중국의 '탕모'라는 전통마을을 답사하고 나오면서 주변의 경관을 스케치한 것이다. 그 때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 있었으므로 작은 수첩을 부리나케 꺼내 몇 초만에 끄적거려 보았다. 이 스케치는 나에게, 중국의 전통마을이 얼마나 강한 인문적인 상징성 속에 존재하는 지를 일깨워준다.

 

                 

스케치 1                                                                            스케치 2

돌이켜보건대, 나에게 전통건축 답사란 단지 건축공부만은 아니었다. 번잡한 도시생활을 떠나 자신을 성찰하는 좋은 기회이었다. 많은 전통건축들은 역사적인 인물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컨대, '도산서당'은 대학자 퇴계의 주택이자 연구실이었다.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올 때 그곳에 가면 누구나 퇴계선생의 아름다운 삶을 만날 수 있다. 퇴계의 고뇌가 담긴 칠언시라도 한 수 읽어보고 떠나보자. 그리고 도산서당의 마루인 암서헌(巖棲軒)에 잠시 앉아 주변을 응시하노라면 8.4평의 작은 집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듯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렇게 답사는 건축공부를 인간학으로 승화시키는 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또 떠나야겠다. 이번엔 어디로 가지? 누구랑? 사실 요즘엔 나에게 모두들 같이 가자고 야단이다. 그것이 나의 해박한 건축지식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에게, 난데없이 뒤에서 외친다. "카니발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