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의 기초자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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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다지자. (2001 중앙일보 제언)

한필원 / 010214

 

건축설계를 하려면 인체 및 생활방식에 대한 자료 등 건물의 사용자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 또한 설계하는 건물과 유사한 사례들에 대한 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설계에 필요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책을 '건축설계 자료집성(data book)'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우리 나라에 '한국' 건축설계 자료집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건축설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미국, 일본 또는 독일의 것이다. 우리의 건축설계 분야에서는 다른 나라의 자료집성을 원용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에 따라 우리의 주변에 실생활과 공간이 갈등을 일으키는 불편한 환경이 생겨나게 되었다. 갓 입주한 새 아파트조차도 거주자의 취향과 생활방식에 맞지 않아 개조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 때, 이미 시공된 벽체와 바닥 그리고 가구들을 교체하느라 많은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근본적으로 아파트가 우리의 구체적인 실생활에 바탕을 두지 않고 설계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공간을 만들어내는 기준이 생활방식이 판이한 나라의 것이라는 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공간과 가구가 실생활과 따로 노는 경우는 우리의 주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우리는 온돌로 바닥난방을 하면서도 그 바닥의 온기를 직접 활용하지 않는 침대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미국 표준(American Standards)'에 따라 변기, 세면대, 욕조가 한 공간에 나란히 있는 욕실을 두고 있다. 그러나, 변기와 욕조가 왜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표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표준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결국 아파트에서 아침 출근시간에 온 가족이 무난히 용변과 세면, 샤워를 하려면 욕실이 두 개는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평수가 이웃의 일본에 비해서도 훨씬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변기와 욕조 또는 샤워기가 놓인 공간이 구획되고 출입문도 별도로 설치된다면 하나의 욕실로도 한 가족의 생활을 무난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해온 생활방식에는 많은 장점들이 있다. 예컨대, 안방과 같이 한 공간을 융통성있게 여러 목적으로 이용함으로써 크지 않은 공간에서도 다양한 생활이 담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전통이 자료화되어 있지 않아서 그것을 새로운 설계에 반영할 수 없는 실정이다. 우리가 가진 생활방식의 이점을 살리면서 현대적인 생활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들의 종류, 규모, 필요한 가구나 비품의 치수와 디자인 등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두들 성급히 근사한 결과를 만들려고만 하지 좋은 결과의 밑바탕이 되는 작업, 곧 한국인의 생활특성을 파악하여 건축설계에 적용할 수 있는 자료를 발굴하고 축적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그러한 일에는 관련 기업이나 단체의 지원도 미약하여 누구도 그 어렵고 보답없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에 맞는 생활환경을 창출하여 불필요한 개보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실생활에서 건축설계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기초적인 작업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