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마을에서의 예술적 유희 - 구림리 '흙의 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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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r Amusement? - Gurim Village Project 1 

 

 <임옥상 - 무제> 

흙은 생명의 근원이다.
현대의 삶은 흙의 기운을 잃어 버린지 오래다.
이제 그 흙의 본래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행위를
시도해 본다.
"잃어버린 토담을 찾아"

가마터가 발굴됨으로써 유명해진,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구림마을. 여기서 2000년 3월 29일에서 6월 28일까지 '흙의 예술제'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어린이들을 대동한 나의 일행이 이 곳을 찾은 5월 6일에는 이 마을에 외지 사람이라곤 우리 밖에 없었다. 우리를 낯선 눈으로 쳐다볼만한 동네 사람들도 드물었다. 그 200명(동네인구)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꼬마 한 둘과 밭일하는 아주머니가 눈에 띌 뿐이다. 징검다리 연휴이었으나 사람들은 이 곳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큰 마을을 잠시 전세낸 셈이다. 적잖은 재미를 주고, 감동까지도 불러일으킬 작품들이 있는데, 아쉬웠다. 아무튼 마을을 전세낸 댓가로 이번 전시를 소개해본다. 간단한 평도 곁들여서......

 

<민현식 - 구림마을의 물길> 

우리의 조상들은 하늘·땅·사람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구림마을의 수로(水路)는 음과 양의
조화로운 체계로 얽혀 있다.
그 짜임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작은 우주를 발견한다.
 

<이 불 - 사이보그> 

고대의 토기,
미래의 로보트 - 사이보그.
태고의 흙으로 빚어만든 사이보그와 토기의 만남에서
인류의 인간성과 문명의 지속성을 갈구한다.

임옥상의 작품은 흙의 물성(物性)을 물씬 풍기면서도 잘 짜여진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마을 샛길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던 내밀한 공간을 '연상'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잊었던 '공간의 기억'을 불현듯 되살리게 된다. 

민현식의 작품은 마을의 공간 조각들이 국토의 공간체계에 매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길과 함께 물길 또한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로 존재함을 드러내준다. 이제 우리 도시에 물길은 없다. 토지에 대한 욕심이 물길조차 덮어버린 것이다.   

이불의 작품에서 흙의 존재방식은 수천년에 걸쳐 연속된다. 같은 존재방식에서도 드러나는 시간의 대비를 통해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명제를 환기시켜준다. 

 

<조덕현 - 프로젝트: 狗林>

2000년 3월 어느날 도기로 유명한 구림마을에서
정체불명의 조형물이 발굴된다. 이 발굴물의 정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마을의 역사를 알게된다.
이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잃어버린 신화를 되찾는다.

  

<윤석남 - 조각배>

대지는 모든 생명의 모태이다. 모성은 생명의 근원이다. 옛 여성의 상징인 고무신과 소용돌이 모양의 배치는
어기찬 여성의 삶을 말해준다.

중국의 병마용을 연상시키는 조덕현의 작품은 유머러스하다. 사람이 떠난 마을을 개들이 점령하였다.  

윤석남의 작품은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정자에 여성의 고무신이 역동적으로 널려있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구림마을 프로젝트는 한 전통마을의 역사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시에 연계시킨 참신한 예술적 이벤트이다. 이미 전원주택의 실험장이 되고 있는 우리의 마을에서 예술적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높이 평가될 만하다. 사실 마을은 우리의 존재방식의 근원을 증거하는 공간조직이다. 그것은 우리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탐구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를 한 사람에겐 언제나 아쉬움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당신이 마을의 공간 또는 장소와 미술의 끈끈한 결합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너무 큰 기대'에 속할 것 같다.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작품들은 대체로 '시간성'에만 매달린 듯하다. 작품이 놓여지는 장소 곧 마을의 곳곳에 대해서도 깊이 고려했더라면 더 좋은 전시가 되었을텐데, 마을의 입구에도, 외진 집에도 같은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우리가 좀더 세심해진다면, 그 곳이 마을의 입구인지, 뒷 구석인지, 큰 길가인지, 막다른 샛길인지에 따라 놓이는 건물이 달라지고 공간의 느낌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장소성의 문제이다. 중성적인 전시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을 가진 곳에 놓이는 작품이라면 마땅히 그 장소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소성을 반영하지 못할 때, 작품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임시로 놓여진 물건처럼 보여진다. 

 

<이형우 - 무제>


21세기 테크노 문화속에서, 오히려 태초의 흙과
인간의 본능적 표현 욕구인 손놀림, 원시적인
불(火)과의 순간적이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소박성과 자연스러운 미를 추구하려 한다.

이형우의 작품은 한 집의 마당에 펼쳐졌다. 또 처마에도 매달렸다. 흙은 바람이나 물과 달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흙으로 빚어진 물건은 그것을 만든 인간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육근병의 작품은 샤머니즘적이다. 어머니와 같은 대지가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다. 새로운 기술로 살아난 대지가 슬프다. 

 

 

<육근병 - 구림의 나라>

봉분 형태의 흙 구조물과 그 속에서 설치된
비디오 눈, 역사의 흙더미 속에 응축된 시간과 자연이
지금의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당산목 가지에 걸린
종들의 울림과 구림마을의 잔잔한 소리가 마을주민의
염원이 되어 울려 퍼지게 하고 싶다.

 

<임충섭 - 풍장(風葬)>


물위에 떠다니는 조각들이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모습들을 통해 대자연에 그대로 내맡겨졌던
옛 사람들의 죽음의 달관과 삶의 숨결을 호흡해 본다.

상대포는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떠난 포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여기에 배를 띄운 임충섭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