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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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ward a sustainable architecture

새로운 세기가 근접해온다. 이와 함께 갑자기 많은 변화가 狂風처럼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또 많은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결재서류들이 어느 날부터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인터넷과 사이버 어쩌구저쩌구......들이 나타났다. 건축동네에서도 잉크와 물감 대신에 AutoCad와 PhotoShop이 등장하고 있다. 쉰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필자 같은 낀세대들도 위기감을 느끼며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놈들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와 사고방식도 따라서 급히 변해가는 것 같다. 이러한 와중에 1990년대에 들어 하나의 새로운 단어가 전세계적으로 대두되었다. 그것이 여기서 논하려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이 말은 지구상의 거주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비교적 저렴한 에너지의 공급과 발달된 설비체계를 바탕으로 그간 인간의 거주공간은 환경적 측면보다 근대경제론의 논리로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지구 온난화 등 환경문제가 전세계적인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그에 따라 개발과 환경보존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결단날 것이라는 상황 인식 아래서 1992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환경과 개발에 관한 유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개발과 환경보전을 대립적으로 여기던 관념을 대신하여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의 개념이 대두된 것이다.

사실 지구가 직면한 환경문제에 우리(저개발국가의 사람들)가 그다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귀찮아서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제까지 화석 에너지를 펑펑 써온 것은 미국 등 선진국들이고 그들이 오늘날 환경문제의 주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지구상의 우리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당신들 스스로 세계화시대라고 떠들어대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알고 보니 '세계화'란, 열매는 소수가 독식하고 껍데기는 아주 평등하게 골고루 나누어서 치우자는 웃기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 세기 초반의 국제주의 양식이 국제적으로 도시환경을 우습게 만들더니 끝까지 웃기는 이야기들로 한 세기를 마무리하려는 모양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춤추다가는 뒤에 좋지 않은 꼴만 당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야기가 좀 엉뚱한 데로 갔는데, 아무튼 우리는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潮流를 '제대로' 수용해나가야 할 것이다.

 

 

'지속가능성'은 '환경'이라는 말과 함께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즐겨 쓰이기 시작했다. 얼마전 '생태학'이라는 말이 그랬듯이. 도시 및 건축분야도 다른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이 말에 귀기울이고 있다. 좋은 예로,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내년(1999년)에 중국의 北京에서 '21세기의 건축'이라는 대주제로 UIA(국제건축가 협회) 총회가 열리는데, 6개의 소주제 중 하나가 '건축과 환경'이다. 이 소주제의 주요한 관점은 바로 거주환경의 지속가능성이다. 요즘 또 우리의 언론에서도 자주 이야기되는 '환경친화적 계획'은 이러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하나의 실천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속가능'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선 새 말이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 개념 자체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이미 그러한 가치관과 의식이 일상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라 굳이 그런 말이 필요없었을 뿐이다. 꼭 周易이니 풍수지리니 하는 이론을 꺼내지 않아도 삶 자체에 그러한 관점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동양의 전통적 思考는 유기적이고 순환적이며 조화적이다. 나는 남과 같이 존재한다. 남이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 아니 나와 남의 구별도 없다. 莊子는 이렇게 말했다. 天地與我竝生立 萬物與我爲一.(천지는 나와 함께 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다.)

 

 

필자는 그러한 사고체계가 만들어낸 전통건축과 마을들을 조사하면서 우리의 공간은 환경적으로 대단히 합리적이며 환경친화적이어서 지속가능성이 강함을 깨닫게 되었다. 자연조건에 적응성을 가질 뿐 아니라, 자원의 순환시스템과 합리적인 에너지시스템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꼭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통주거지는 본질적으로 '지속가능성'을 갖는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지속가능성은 자연환경적인 측면에 국한되는 의미는 아니다. Amos Rapoport가 주장하듯이 전통주거지에서는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자연환경적으로 불리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은 사회적, 경제적 의미로 확대되어야 말뜻을 다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대부분 도시조직에 건축행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도시에서는 자연환경 못지 않게 인조 환경의 비중이 크다. 그러면 도시에서 어떠한 건축이 지속가능할 것인가? 답은 도시의 자연적, 인공적 환경을 해치지 않고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며 사회경제적으로 相生的인 건축일 것이다. 산이나 하천 같은 자연요소와 다른 건물들,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낸 도시조직을 존중하지 않는 건물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도시환경의 질을 저하시키고 장기적으로는 도시에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건축, 말하자면 우리의 관습과 행태에 어울리지 않는, 어디선가에서 서투르게 이식된 건물들, 地價를 따라 덩달아 낭비적으로 치장되었으나 기술의 합리성을 결여한 건물들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건축가들은 오늘날 자신의 건축행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좁은 관점으로 도시와 건축을 이해함으로써 도시환경을 손상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는 클라이언트보다 건축가들의 建築觀 때문이다. 싸게 해달라고 끈덕지게 늘어지는 고객일지라도 '옆집과 뒷산을 무시하는 건물을 설계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지는 않으니까...... 특히 우리는 지나치게 완결적인 설계를 함으로써 건축의 성장가능성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두루 변하는 것이 세상의 본질이거늘 건물을 靜的인 대상으로 파악함은 잘못된 것이다. 결국 완결적인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의 요인이 생겨났을 때 파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도시를 새로운 조건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또 도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것들을 부수고 다시 짓는 수밖에 없다. 우리 도시에서는 전쟁이 났을 때보다 더 많은 파괴가 일어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도시에서 시간의 차원은 사라지게 되었다. 시간이 사라진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점차 일상에서도 시간의 의미를 잊어가지 않을까? 이제 모두들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아, 시간 없다! ...... 어쩌면, 시간은 원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몰라.' 아니! 일찍이 시간개념이 발달한 우리에게 우째 이런 일이?(우리말의 宇宙를 서양에서는 공간개념에 국한된 cosmos 또는 space라고 한다. 우주에서 宇는 공간개념이고 宙는 시간개념이다.)

이와 달리, 필자는 전통건축을 답사하면서 집 자체가 완결적으로 구성된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우리의 집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덧대고 증축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옆에 새로 한 채를 지어도 균형을 잃지 않은 예가 많다. 우리 건축의 단위는 집이 아니라 영역이었다. 그 영역은 때로 강한 폐쇄성과 제한성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집들은 많은 경우 짝을 가지고 있다. 亭子는 연못과 짝을 이루고 사당은 뒷산과 짝한다. 환상의 신크로나이즈다. 그러니까 전통건축을 구경할 때 그 한쪽만 보는 것은 반도 못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건축은 하나하나의 건물이 단위이며 영역의 개념은 모호하다. 가까운 곳에 우뚝 솟은 자랑스런 '제3 삼청사' 건물은 누구랑 짝을 이루는가? 그것은 어떠한 영역에 속하는가? 그렇게 홀로 잘나 높이 솟은 건물들은 대개 자폐적이다. 내부와 외부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칼같이 구분된다. 확장가능성이란 없다. 완결적이다. 그것들은 안으로 움츠러드는 건축이며, 밖으로는 노폐물을 발산하는 건축이다. 그것은 相生의 건축, 지속가능한 건축과 거리가 멀다. 열 수 없는 창으로 매끈하게 단장된 그 건물들은 무자비하게 에너지를 소모하여 폐열을 발산하고 쓰레기도 마구 쏟아낸다. 우리의 아파트도 그런 類이다. 아파트 단지를 보면 쓰레기가 차고 넘쳐 난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마을은 어이해 쓰레기차 없이도 한결같이 깔끔하게 유지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그간의 개발방식은 더할 수 없이 反지속가능적이었다. 주변에 있는 屯山을 보자. 그것은 이미 둔山이 아니다. 사실 개발 이전의 풀 한 포기라도 그대로 있는 것이 있는가? 필자는 몇 년 전 둔산 개발이 한창일 때 하루는 둔산에 있는 현장에 들렀는데 허허벌판인 둔산의 한가운데에 아파트 십층 높이는 될만한 커다랗고 잘생긴 나무가 길가에 심겨지는 것을 보았다. 커다란 트럭과 크레인이 동원되어 그 나무를 옮기는 데는 억대의 돈이 들었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다보니 나무 꼭대기에 있는 까치 집이 눈에 띄었다. 그때, 까치들이 얼마나 황당하였을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어 흙바람이 시커멓게 온 둔산을 뒤덮는 것이었다. '이러다 이 벌판에 소리없이 묻혀 화석으로 굳는 것은 아닐까?'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 이러한 무지막지한 개발 덕에 솔직히 건축가, 또 여러 사람들이 재미를 톡톡히 보았지만 앞으로는 달라져야 마땅할 모습이다.

지속가능성이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그에 순응하자는 자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을도 있는 그대로 이어져온 그야말로 '자연부락'은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가장 적절한 인위적 선택을 끊임없이 해 온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이 자연적, 사회경제적 의미를 포함한 총체적 환경을 살리고 지속하는 것이었음은 전통마을을 미시적으로,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단편적으로나마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통건축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지속가능성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建築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건축은 시간의 축적 속에 겸손히 하나의 켜를 이루는 데 기여를 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측면들을 오래 생각하여 지속가능한 건물을 만들어내도록 노력하는 건축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의 화려한 변신을 쫓다가 결국 거기서 소외되고 배신당하는 악몽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시간을 되찾는 날이 오도록 작은 노력을 보태야 한다.